brunch

매거진 단편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랑 Nov 30. 2019

단편_茶

마지막 날, 테이블 위에 놓인 차를 기억하나요? 

커피를 좋아하는 당신은 항상 녹차가 텁텁하고 떫어서 싫다고 했지요. 


서러운 단어를 들을 것을 알지 못한 채로, 

저는 언제나처럼 당신이 녹차를 좋아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좋은 녹차를, 

이른 봄, 첫 비가 내리기 전 돋아난 새순을 덖은 가장 깨끗한 차를 준비했습니다.


녹차 우리는 법을 알고 있나요?

펄펄 끓는, 너무 뜨거운 물을 부으면 찻잎이 익어버리고 쓴 맛이 역하게 올라옵니다.

찻잎을 너무 오래 우리면 찻잎의 모든 것이 빠져나와 떫은 맛이 독하게 올라오지요.

한 김 식힌 후, 열기가 다소 누그러진 물을 서서히 부어 천천히 조심스레 맛이 퍼져나오게 해야 합니다.

수색이 피어나고 향기가 번지면 미련없이 찻잎을 건져내어야 하지요. 

맛있는 녹차를 만들어내는 것은 나름 세심한 과정을 견뎌야 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만들어준 녹차는 언제나 엉망이었지요.

너무 뜨겁게 우려내어 쓰거나 한없이 물에 담가놓아 떫었습니다. 

가진 것을 모두 내어 보내고 힘없이 늘어진 찻잎을 바라보는 것은 가슴아팠지만 당신의 손으로 만든 차는 달콤했습니다.


당신은 커피가 어울리는 사람이었어요. 

언제나 당신이 마신 것은 뜨거운 온도로 높은 압력에서 추출하여 깊고 진한 풍미가 담긴 에스프레소였지요.

기다림과 적당함, 부드러움이 담긴 녹차는 당신의 곁에 설 수가 없었습니다.

욕심이었지요.


언젠가 여행지에서 한 번 홍차를 끓여주었을 때, 마실 만하다고 했지요. 

고작 전기포트로 끓인 정수된 물에, 립톤 옐로우라벨 기본 홍차 티백을 담아 주었을 뿐인데.

뜨거운 물을 무심하게 부어 우려내는 홍차는 녹차만큼 예민하지 않아 별다른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사실 홍차와 녹차는 같은 잎이에요.

찻잎을 발효시키는 정도에 따라 백차, 녹차, 황차, 홍차, 흑차가 됩니다.

나는 홍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진한 향은 숨을 막히게 했고 탁한 색은 기분을 흩뜨려놓았지요. 

깊게 발효되어 풍성한 향을 펼쳐내는 홍차였다면 당신이 좋아해 주었을까요?


얼마 전 비알레띠 모카포트를 샀어요. 

이태리에서는 가정집에서 이 자그마한 주전자로 커피를 만들어 마신다고 했지요.

순식간에 커피를 만들어내는 에스프레소 머신과 달리 가스불에 천천히 추출해내는 모카포트는 녹차를 우리는 것과 같은 감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당신을 만날 때에는 생각없이 마시던 커피였지만 이제는 조금씩 원두의 맛을 구별하고, 에스프레소에서 향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 테이블 위에 놓인 차를 기억하나요? 

저는 당신이 손도 대지 않은 채 매몰차게 남겨놓고 떠나, 무한한 시간동안 우려내어 찻잎의 영혼마져 빠져나간 쓰디쓴 차의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녹차를 싫어하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