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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으로만 Dec 22. 2020

밥벌이의 신성함

20년 넘는 직장 생활 동안,
회사 밖에 몰랐던 사람이
창업이란 것을 하고 부업을 하게 되면서
마흔여섯 나이에 비로소 알게 된 것들, 하게 된 생각들을
스스로 기억하기 위해 기록합니다

몹쓸 기억력의 소유자이기에,
이렇게라도 기록해 두지 않으면
지금의 떨림과 설렘과 두려움을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참 힘들어서 때려칠 마음을 막 증폭시키고 있을 때, 어느 날 미사 중에 퍼뜩 이런 생각이 든 적이 있다.


'맞벌이 중 한 명이 회사를 그만두면 나머지 한 명에게 완전 배신 아닌가?'


전에 없이 남편과의 동지애가 움트면서, 직장이라는 게 그렇게 짜증난다고 내던질 문제냐 다시 생각해 보자고 마음을 다잡았었다.


이직 말고 그냥 퇴사하는 동료들에게서는 '짜증나서 못하겠다' '당분간 좀 쉬련다' 류의 변을 흔하게 듣는다. 그래서 은연 중에 나도 짜증나고 좀 쉬고 싶으면 그만 둬도 된다는 의식이 생긴다. 설상가상, 요즘엔 퇴사하고 자기 자신을 찾으라고 부추기는 책과 컨텐츠가 넘쳐난다.


하지만 정신 차리고 다시 보자. 짜증나 미치겠어도, 배알도 없냐 소리를 들으면서도 생계를 위해, 처자식 또는 부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 모든 설움을 일상화(또는 무의식화)하면서 매일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길에 나서는 직장인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매달 나오는 월급이 마약같다는 말은 달콤한 그것에 과도하게 얽매이거나 당연시하는 걸 경계하자는 의미이지 하루 빨리 끊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요즘 부업 열풍도 돈 버는 법이 월급 말고도 많다는 걸 가르쳐주는 것이지 월급 잘 나오는 회사를 어서 때려치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월급으로 쌀도 사고 옷도 사고 집세도 낸다. 차도 사고 아이도 가르치고 부모님 용돈도 드린다. 조금씩 남겨서 종잣돈을 만들어 주식에 투자하는 것도 모두 알바든 뭐든 근로 소득이 시작이다. 그리고, 완전히 무에서 유를 만드는 건 엄두가 나지 않는 사람들이 갖춰진 시스템 안에서 일부분을 담당하는 월급쟁이를 선택해 이 근로 소득을 만들어 간다.


가진 것 없고 기댈 곳 없고 특출난 재능이 없어 남들처럼 멋있는 스타트업 만들어 수십배씩 뻥튀기해서 엑시트 시키고 테슬라 끌며 떵떵거리지 못하고 남들 밑이나 닦아주는 것 같아도 그렇게 해서 번 돈으로 삶은 돌아간다. 많은 사안들을 먹고 사는 관점으로 보기 시작하면 자못 숙연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체로 늘 철이 없는 나는 가히 충동적으로 멀쩡했던 직장을 때려 치운 경험이 있다. 총 5개월 중 2개월의 비자발적 백수 기간은 지옥 같았고, 이 경험이 이후 16년 동안 근속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짜증나서 때려친다며 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쉰다며 그만둬서는 몇년 째 쉬는 사람들도 있지만, 때려치는 경험을 해 보지 않고 묵묵히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은 건 확실하다. 우리가 아는 것 보다 많은 사람들이 밥벌이를 위해 뚜벅뚜벅 걷고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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