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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속으로만 Feb 11. 2021

이 시대의 소비

무한 물욕을 정당화 하는 유일한 길

3년 전 몸 담고 있는 회사에서 연중 가장 큰 행사를 시작한 날, 만나는 사람마다 주고받는 인사는 "뭐 샀어요?" 였다. 그 해 최고의 지름템은 에어팟. 기분 탓이겠지만 행사 이후 지하철에서 이 물건을 귀에 꽂은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았다.


나는 난감했다. 이 행사 전부터 급락한 주가와 이 떨어진 주식을 팔아 치러야 할 모종의 중도금 때문에 소비 억제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꼭 소비 억제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이트에서 생필품 아니면 품목 선정이 끝난 상태에서 오로지 가격 혜택을 봐야 할 때 가지고 있는 온갖 쿠폰을 붙여 사는 쇼핑만 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애사심 없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었다.


물건 파는 사이트를 운영하는 회사의 직원들답게 매일 매일 올라오는 딜을 체크하며 쇼핑리스트를 공유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또 한번 생각이 많아졌다.


이미 물건은 차고 넘치는데, 없어서 사는 물건 말고 싸서 사는 물건, 그것도 '전에 알던 가격 보다' 싸서 사는 물건들로 수납장은 또 다시 차고 넘친다.


옷이 수십 수백벌 있어도 입을 옷이 없는 나같은 여자들이 대표적이다. 계절마다 옷을 사대도, 심지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아이템은 늘 남아 있다. 진짜 없어서라기 보다는 세상에 없던 스타일의 신상들 때문이기도 하고, 내 취향이 바뀌어서 이기도 하고, 드물게는 낡아서이다.


원래 패턴 있는 옷은 잘 입지 않지만 언젠가부터 눈에 들기 시작한 복고풍의 노르딕 스웨터 하나는 적당한 걸로 꼭 하나 장만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거나, 모노톤이 지겨워진 어느 날 습관처럼 브라우징 하던 자라 앱에서 선명한 초록색 코듀로이 와이드 팬츠가 5만원 밖에(?) 안 하는 걸 봤다거나, 털이 보송보송한 구찌 슬리퍼가 스타일로 보나 가격으로 보나 회사원에게 왠말이냐 하다가도 매치스나 마이테레사 프로모션 코드가 먹히는 걸 발견하는 순간을 마주하면 쇼퍼들은 갈등하다 합리화한다.


'신발장도 꽉 찼는데.. 안 신는 낡은 신발들은 빨리 버리자. 그리고 이 비싼 신발은 마르고 닳을 때까지 평생 신으면 돼'


흰 와이셔츠, 브이넥 니트, 블랙이나 네이비 블레이저, 날렵한 펌프스, 트렌치코트 같은 기본 아이템도 복병이다. 진짜 맘에 들고 몸에 잘 맞고 코디도 잘 되는 아이템을 만나는 그날 까지 그 품목에 대한 숙제는 풀리지 않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흰 셔츠는 안에 받쳐 입기는 좋은데 단품으로 입을 게 없다거나, 몇년 전 산 싸구려 브이넥 니트는 보풀이 심하니 좋은 걸로 하나 개비해야겠다느니 하는 이유다.


오랜 죄책감의 결과로 올해 혼자 정했던 기준은 최대한 있는 옷을 활용해서 새롭게 코디하는 것으로 옷입는 재미를 찾자는 것이었다.


96년 당시 거금을 주고 구매한 엠포리오 알마니 개버딘 블랙 블레이저를 2018년 외할머니 장례식 때 모친께 빌려드리고 4일장 내내 각이 잘 잡혀 있는 모습에 뿌듯했던, 20년전 막스마라 아웃렛에서 산 iBlues 체크 자켓을 매년 가을 꺼내 입는데 2-3년전부터 체크가 대유행하자 남들 다 입는 체크가 아니라서 더 기분 좋아지는 경험을, 그런 아이템을 넓혀보자는 그런 생각이다.


이런 생각 덕분에, 제대로 정리해 보지는 않았지만 작년, 재작년보다는 옷을 확실히 덜 샀다. 그러고보니 이번 겨울에는 매치스와 마이테레사에서 할인코드가 오지 않았다! ㅋㅋ 웃프다.


뭔가 필연처럼, 이런 상태에서 급기야 True Cost 라는 다큐멘터리까지 보고 말았다. 이번 매치스 세일에서는 소소하게 베트멍 반팔티셔츠와 홀리데이 부알로 스웻셔츠, 퀸앤벨 가디건 등 몇개 개이득템을 담아놓은 상태여서 보는 내내 괴로웠다.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디자이너 브랜드를 알게 되고 그 스타일을 시도하는 것이 청담동 분더샵 같은 데를 드나들 수 있는 재력과 시간과 안목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했었다면 이젠 그런 사람들의 층이 훨씬 넓어진 건 분명 모바일의 힘. FTA 까지 가세하여 분더샵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디자이너 브랜드를 공급하는 유럽 사이트들 덕분에 오프라인 매장에 찾아다닐 시간도 돈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의 취미 생활도, 안목도 예전보다 풍요로워졌음은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한번씩 H&M 매장에 헌옷을 한무더기씩 기부해도 그 옷이 자국에서 재소비되는 양은 1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아이티로 보내져 그 나라의 의류 시장을 아예 없앨 정도의 엄청난 중고 의류 시장을 만들어버린다는 사실과 무엇보다 하루 3달러 받고 일했던 방글라데시의 1천명 넘는 여공들이 무너져 내린 공장 건물과 함께 깔려 죽는 현실을, 그 나라에서는 그 일자리가 그나마 나은 것이기에 포기는 커녕 잃을까 두려워하는 불과 40년전 우리 한국 사람들과 비슷한 삶을 사는 인도,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나를 표현하기 위한 옷입기를 위해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


더욱이 이 사슬의 뿌리에는 토양과 하천이 관여돼 있어 설혹 지금은 수만 키로 떨어진 먼 나라의 땅과 물이 오염됐다는 뉴스를 접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다 연결되어 있는 지구와 자연은 나와 내 가족에게도 종국에 영향을 줄 것이므로 외면은 한 치 앞을 모르는 바보짓이다.


결국 모두를 위해 덜 사고 참아야 하는 것이다. 파타고니아 창업자의 말처럼 '두 번 생각'해야 한다.


"Own fewer things but real good things!"


이 와중에 물건 파는 사람이 된 나는 판매할 상품을 고를 때도 이 기준을 따른다. 그래서 브랜드 슬로건도 이렇게 정했다.


'오래 쓸 좋은 그릇을 정성껏 고릅니다'


하나를 사도 신중하게, 최대한 오래 쓸 수 있는 물건을 사는 것 만이 부족할 것 없는 시대의 소비를 정당화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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