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킬링디어> 감상법
그것은 마치 미술작품이 스토리가 아니고 음악이 스토리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미술에도 스토리가 담길 수 있고 음악에도 스토리가 담길 수 있듯이 영화에도 스토리가 담긴다. 하지만 영화는 스토리 그 이상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어떤 영화는 스토리를 욱여넣는 것에 급급한 영화도 많지만 그런 영화를 우리는 '후지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보통 영화를 보고 나면 스토리를 이해하고, 해부하고, 재구성하는데 몰두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마치 렘브란트의 <야경>을 보고는 그 그림에 담긴 스토리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에 모든 감상의 사활을 거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를 구성하는 작은 플롯들은 각각 어떤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관객에게 1대 1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요소들은 전체 영화를 구성하는데 녹여질 뿐이다. 그것은 마치 미술작품의 색채 하나 붓질 하나가 개별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훌륭한 미술작품은 단 하나의 색채나 붓질이나 작은 형태가 전체 작품에 불필요하거나 조화를 헤치지 않듯이, 훌륭한 영화의 모든 개별적인 부분들은 전체를 구성하는데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이성적인 이해가 영화감상에도 도움이 되지만 어떤 영화는 머리로 이해하기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것, 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체의 반응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러니 <킬링디어>를 보고 불편하고 역겹고 화가 난다면 영화를 아주 잘 감상한 것이다. 적어도 1차적으로는 그렇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반응이 있겠지만, 실은 <킬링디어>에 담긴 스토리는 아주 단순한 편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분명 <킬링디어>에 담긴 스토리는 아주 단순하다. 모르겠다는 반응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인식의 범위에서 떨쳐내기 위한 본능적 자기방어이다. <킬링디어>의 명백하고 가혹한 질문을 회피하고 싶기에 내용이 어렵다고 도피하는 것이다. 그 역겨운 진행, 그 야만적인 결론에 대항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기에 <킬링디어>가 나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보통의 감상법이다.
그럼에도 5만명 이상의 관객이 이 영화를 본 것은 순전히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전작 <랍스터>에 대한 입소문과 칸영화제 각본상, 그리고 니콜 키드먼 때문일 것이다.
관객은 영화의 내용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잘 알고 있는 내용을 머리에서 지우고 싶을 뿐이다. 왜냐하면 불편하니까. (그리고 그런 반응은 정당하다.)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 누구도 마틴식의 복수를 '정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마치 다른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의사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의료사고 처리에 대해서는 아예 양측이 꺼내 들지도 않는다. 결국 한쪽으로 치우친 딜레마 속에서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는 외과의사 스티븐의 가족은 마틴이 제시하는 방법에 사실상 순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일상의 국면에 마주하고 있다. 마틴의 해결책이 전혀 정의가 아니지만 그것 이외에 다른 정의를 가져올 방법이 없는 상태, 즉 현대의 도덕적, 법적 딜레마 상태를 직시하게 된다.
영화 속 이 장면은 어떤 뜻이고, 또 이 말은 어떤 의미를 담았고 하는 식의 중등학교 국어교육식으로 <킬링디어>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영화를 더욱 미궁에 빠뜨리고는, 전혀 그럴듯하지 않은 탈출구를 찾아냈다고 말하기 좋아하는 영화 덕후들이 하는 감상법이다. 이들도 꽤나 집요해서 나름 그럴듯해 보이는 괴이한 이성적 이해방법을 찾아내기도 한다.
놀랍게도 마틴은 악마가 아니다. 마치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면 그것이 집행되듯이 마틴은 판결을 내렸을 뿐이다. 단지 그는 현대인이 생각하는 법=정의 인식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너무나 명료한 정의의 해법에 따라 판결을 내렸다. 그 외에 그가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는 친절하고 예의 바르고 명민하다. '판결' 이외에는 어떤 악마성도 드러내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는 악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이 행하는 직업상의 일에서 벌어지는 부주의로 인한 '살인'은 대부분 은폐되거나 증명되지 못하고 지나간다. 그것이 정의인가? 의사 스티븐도 그것이 정의가 아니란 것을 알기에 마틴에게 어쩔 수 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다.
결국 누구에게나 정의라는 개념은 존재하고 그것을 추구하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을 때 정의를 감추거나 폐기하거나 또는 원시적인 정의를 끄집어내는 상황을 <킬링디어>는 보여준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본 관객은 빨리 이 딜레마로부터 도망가고 싶을 뿐이다. 영화가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잘 모르겠어, 라는 반응이 어쩌면 가장 쉽게 이 딜레마를 피해 빠져나가는 방법일 것이다.
아니라면 이 영화의 빛, 카메라 각도와 특수렌즈, 구도, 늘어진 템포에 긴장감을 주입하는 불협화음의 음악, 그리고 시체놀이, 자위, 겨드랑이 털, 시계 가죽끈, 스파게티 등 수많은 부속품의 조합으로 나의 가슴속에 남겨 놓은 떨쳐버리기 힘든 지독한 어떤 냄새를 오랫동안 내 몸에 묻히고 다니면서 세상의 번듯한 정의 속에 이 고약한 냄새를 풍겨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