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로 Oct 04. 2020

학자


깜짝 놀랐다.

이 나종일이 그 나종일인가?

의심스러워 찾아보니 역시 그 나종일이었다.

1,562쪽에 달하는 이 책 <자유와 평등의 인권선언 문서집>을 번역하신 분.


그뿐이 아니었다.

놀라워서 좀 더 찾아보니...

4년전쯤에 나종일 선생은 임마누엘 월러스틴의 역사서 2권을 번역했고, 1,200쪽에 달하는 <영국의 역사>를 공동집필했다.


왜 깜짝 놀랐냐고?

이 선생의 당시 나이가 90세 가까이였다.

"에이~ 그러면 제자들 시켰겠지."

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만...

천부당만부당.


약 2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그때도 역시 할아버지였고 은퇴한 명예교수였다.

출판사 기획 책임자로서 그분의 연구실을 여러차례 찾아갔다.

지인이 쓰라고 내준 작은 사무실.

반듯한 네모도 아니고 약간 찌그러져 세모꼴이 되어버린 볼품 없는 사무실이었다.

한 여름에 냉방도 잘 안되어 부채를 부치며 <옥스포드 영국사> 번역 원고를 수정하고 있었다. 제자들과 함께 번역한 책인데 제자들의 번역이 엉망이라고 투덜거리면서 일일이 다 수정을 했다.


다시 15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때도 노교수였던 그 분에게 '영국사 강독'을 수강했다.

마치 고등학교 영어시간 같았다.

학생 한 명씩 찍어서 한 단락씩 번역을 시켰다.

대부분 엄청 깨졌다.

엄밀함과 정확함.

그 분의 필생의 철학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분이 선택하는 텍스트는 늘 당대의 가장 update되고 hot한 것이었다.(덕분에 1990년대 후반에야 국내에 <여성의 역사> <사생활의 역사> 등의 저작이 활발하게 소개된 조르주 뒤비의 초기 저작을 1980년대초에 맛볼 수 있었다.)

그분은 하던 걸로 계속 울거먹는 법이 없었다.


또한 위의 월러스틴 책을 번역하고 <자유와 평등의 인권선언 문서집>을 번역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듯이 그 분은 늘 '우리 편'이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티를 내지 않았다.

늘 학문적으로 지독히 엄격하고 인간적으로는 너그러운 분이었다.

어떤 70살 넘은 노 학자가 제자들의 후진 원고를 하나하나 손본단 말인가?


그분에게는 어떤 수식어도 붙이고 싶지 않다.

그분은 '학자'다.


그분이 있었기에 당시 같은 강단에 있던 이인호(박근혜 때 kbs 이사장)라는 추한 노인 밑에서 공부했다는 불명예를 조금은 달랠수가 있다. (이인호라는 인간은 자기 은퇴할 때 여자 교수 티오로 박지향를 박아놨는데 그는 그후 뉴라이트로 맹활약! 지들끼리 보는 눈은 있어갈꼬. 여기서 나의 불명예가 심화되는데 그 뉴라이트 교수랑 필자가 같은 대학원을 다녔다는... ㅠㅠ)


구순을 넘긴 나종일 선생.

2014년 이후엔 새로 나온 책이 없다.ㅠㅠ

모교를 기억하는 순간은 오직 이 분을 떠올릴 때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채식주의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