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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Oct 06. 2020

생명과 죽음의 변증법

1. 

인간은 죽는다. 당연하다.


2. 

인간은 "죽을 수" 없다.
무슨 헛소리인가?

(하지만 이 글은 이 명제를 증명하고자 한다)


3. 

인간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다. 이것은 가만히 생각하면 말이 되는 이야기다. 누가 죽음을 경험했겠는가? 경험은 과거의 반추다. 죽음 이후 그 주제가 없으므로 당연히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물론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본다. 그것은 보는 것이지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화가 뭉크는 죽음을 경험하고 싶어서 죽는 순간 또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으려고 했다. 설사 찰나의 순간 죽음을 경험했더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모든 사람은 잠이 들지만 잠이 드는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 자각할 수 없고 인지할 수 없다. 오직 잠에서 깨어났을 때라야 잠을 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죽음은 잠과 같다. 그 순간을 누구도 인식할 수 없다. 그리고 다시 깨어나지도 않는다. 그리고 잠의 세계를 지배하는 무의식조차도 깔끔하게 사라진다. 즉 죽음은 '무'이다.


4.

여기서 우리는 "무"(존재의 반대말)라는 말을 썼다. 무는 고도로 추상화된 하나의 개념이다. 수학의 0과 같다. 아니 그보다 더 추상화된 것이다. 0이란 사실조차 없는 상태가 무이다. 그렇기에 무는 오로지 그 반대인 '존재'를 통해서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존재를 통해서 무를 가늠해볼 뿐이다. 실제로 무가 무엇인지 인간은 알 도리가 없다. 죽음이 무이고 인간이 무를 알 수 없다면 인간을 죽음을 알 수가 없다.


5.

존재의 본질은 존재이다. 생명의 본질은 생명이다. 생명은 생명 이외의 것을 선택하지 않으며 선택할 수가 없다. 인간이 간혹 아니 자주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하거나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죽음을 "향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결코 죽음은 선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선택한단 말인가?


6.

죽음을 "향하는" 것은 생명이 더욱 큰 생명을 취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생명의 불꽃이며, 생명의 초월이며, 생명을 이기는 생명, 좀 난삽하게 말한다면 생명의 발악이다. 죽음을 향하는 것은 (무로 향할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생명으로부터의 도피이다. 생명은 늘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는 일, 생명을 피해 달아나는 일, 생명 뒤에 숨는 일은 너무나 무섭고, 힘들고, 어렵다.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7.

생명은 너무나 큰 힘이기 때문에 무엇도 생명에 대항하여 이길 수가 없다. 단지 인식 불가능한 무만이 생명의 심연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니 "죽임"은 얼마나 거대한 암흑인가? 생명을 단칼에 무로 돌려놓는 "죽임" 말이다. (여기서는 "죽임"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다.)


8.

생명은 절대로 늙지 않는다. 생명은 그 본질이 생명, 더 큰 생명일 뿐이다. 죽어가는 세포들, 쇠락하는 신진대사, 줄어드는 에너지. 이것은 모두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렇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현상이 죽음을 선택한, 죽음을 향한 움직임은 아니다. 쪼그라든 육체에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치열한 생명의 본능이다. 생명은 절대로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다. 단지 무를 맞닥뜨릴 뿐이다.


9.

결국 한 생명의 주체인 인간은 죽을 수 없다. 무를 만날 뿐이다. 죽음의 선택은 죽음을 향하는 생명의 더욱 가열찬 투쟁이며, 죽음은 경험될 수도 없고, 생명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죽을 수 없다. "죽을 수"라는 말에는 의지, 과정, 경험 등이 숨죽여 내포된 의미이다. 단지 죽음이라고 표현되는 무가 있을 뿐이다.


10.

결국 생명에게 허락된 것은 생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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