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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Oct 17. 2020

<벌새>(2018)

김보라

[그 전형성에 대하여]


이처럼 평온할 수가. 지나 보면 격동의 한 시절도 그곳에 머물고 숨 쉬던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영화 <보이후드>가 성장의 종단면을 잘라서 보여주었다면 <벌새>는 성장의 횡단면을 잘라서 보여준다. 한 순간도 인위적 긴장을 조성하지 않고, 한 장면도 지나친 감정을 오버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조용히 등장인물들을 응시하고 그래서 관객은 아주 서서히 1994년의 공기를 함께 호흡하기 시작한다. 슬픔이 있으면 기쁨도 있다는 하나마나한 이야기 같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러나 진실한 삶에 우리를 맞닿게 한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꽤나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시대에는 낡고 오래된 대치동 아파트에 살면서 떡집을 운영하며 부지런히 돈을 모아 1남 2녀의 자식을 키워나가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 한 가족의 삶으로 카메라는 조용히 침투해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일들이 적절한 호흡과 템포와 긴장감을 가지고 가지런히 일어난다. 피가 흐르는 부부싸움도 이튿날 부부가 함께 낄낄대면서 TV를 보는 것으로 쉽게 해소된다. 늘 지나침이 없다.


둘째 딸 은희는 그런 가운데 자신의 성장 에너지를 흡수한다.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졌다가 하는 친구들, 날라리가 되어가는 언니, 공부 잘해서 귀한 대접받는 오빠의 폭력, 고리타분한 학교 선생님, 운동권 출신 학원 선생님, 재개발 철거로 쫓겨난 주민들, 성수대교의 붕괴 등이 그녀의 삶을 둘러싼다. 제법 강하고 굵직한 사건이나 관계나 환경이지만 수술로 제거된 그녀의 귀 밑 혹이 작은 흔적을 남기면서 제자리를 찾아가듯이 그렇게 그녀의 삶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인다.


마음을 의지하는 학원 선생님과의 인연과 성수대교 붕괴로 인한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굳이 집어내자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지만 그 조차도 영화의 흐름을 격렬하게 흔들지 않는다. 얼마 전 갑자기 죽은 딸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학원 선생님의 어머니 모습이나, 선생님에게 주려고 선물로 가져간 떡 꾸러미를 다시 가져와 물끄러미 바라보는 은희의 모습이나 왜 이다지도 평범하단 말인가?


<벌새>의 전편을 흐르는 이러한 평온함과 평범성은 김보라 감독의 이 영화를 통해 추구한 '전형성'에서 비롯된다. 김 감독은 그야말로 전형성의 화신이다. 인물들을 그 시대 그곳에 자리매김하고 거기서 보편성을 추출해 낸다. 그렇게 탄생한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가장 아빠답고, 엄마답고, 선생님답고, 친구답고, 언니답고, 오빠답다. 전형성에서는 반전이나 과장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자 동시에 한계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휴학한 운동권 여대생인 한문 학원 선생님의 담배 피는 모습이나, 그녀가 보는 <자본론>을 비롯한 책들, 그리고 알고 보니 꽤나 잘 사는 집의 딸이었다는 사실. 이러한 세심한 전형성은 피식하고 싱겁게 웃음을 짓게 한다.


어쩌면 유일하게 이 영화에서 전형성을 탈피한 것은 학문 학원이다. 왜 은희가 학생이 2명뿐인 그리고 대학 입시에 별 도움이 안 되는 한문 학원을 다니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고 적절한 배경도 없다. 이는 아마도 은희를 둘러싼 관계 중 전형성을 탈피한 "운동권 여대생과의 만남"을 이루기 위한 인위적인 설정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관계는 너무나 따스하고 감화적이기에 도리어 전형성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 영화의 미덕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 '벌새'는 1초에 60번씩 날갯짓을 한다. 그러한 운동 에너지를 충당하기 위해서 하루에 자기 몸무게만큼의 꿀을 흡수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은희의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그러한 필사적인 날갯짓이 느껴진다면 이 영화의 전형성은 우리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삶 가운데 은밀히 퍼져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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