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로 Oct 21. 2020

'죽음'을 직시한 칸느의 영화들

1983년 제3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나라야마 부시코> 이마무라 쇼헤이(일본)

1997년 제50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체리향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

2010년 제63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엉클 분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태국)

2012년 제6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아무르> 미카엘 하네케(오스트리아)


이 영화들은 모두 죽음을 다루고 있다. 웬만한 영화라면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를 할애하는 그런 흔한 죽음이 아니다. 영화 자체가 온전히 죽음만을 응시한다. 죽음이 주제이며 소재이다. 영화를 통째로 죽음에 헌사한 것이다.


1983년 제3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나라야마 부시코> 이마무라 쇼헤이(일본)

<나라야마 부시코>에서의 죽음은 곧 생명이다. 공동체의 존립을 위한 생명의 순환으로서의 죽음이다. 늙은 자기 부모를 산속 깊숙한 곳에 떨구고 돌아서는 아들이나, 해골들이 사방에 뒹구는 곳에서 자신의 죽음을 조용히 맞이하는 부모나 모두 한 없는 고통이겠지만 그것을 견뎌내야만 한다. 죽음은 성스럽고 아름답다. 생명의 완성이다.


1997년 제50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체리향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

<체리향기>에서의 죽음은 허무이다. 종교도, 도덕도, 친절한 설득도, 달콤한 체리향기도 그 허무를 앗아가지 못한다. 언뜻 고통스러운 것 같지도 않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 같지도 않다. 허무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무덤을 파고 그 안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그 지독한 허무의 실체는 무엇일까? 당연하다. 허무는 '무(無)'의 확장이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허무를 정복할 수가 없다.


2010년 제63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엉클 분미> 아피찻퐁 위라세타꾼(태국)

<엉클 분미>에서의 죽음은 회귀이다. 불교적 세계관의 환생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여행이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과 유령들이 모두 그의 죽음 여행을 마중한다. 그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단지 산 사람들은 그를 온전히 보내고 생경한 생활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여전히 죽음은 가까이 있다.


2012년 제6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아무르> 미카엘 하네케(오스트리아)

<아무르>에서의 죽음은 곧 사랑이다. 남편은 죽음을 기다리는 아내를 베개로 눌러서 어렴풋이 남아있던 생명을 끝낸다. 아내는 마지막 순간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남편의 손길을 이끌어낸다. 생명은 우악스럽게 저항한다. 생명이 남아 있다는 것이 어느 때에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고통이다. 존엄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는 더 현명한 방법은 없는 것일까? 사랑은 그렇게 절규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가오는 것들>(201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