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제3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나라야마 부시코> 이마무라 쇼헤이(일본)
1997년 제50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체리향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이란)
2010년 제63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엉클 분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태국)
2012년 제6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아무르> 미카엘 하네케(오스트리아)
이 영화들은 모두 죽음을 다루고 있다. 웬만한 영화라면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를 할애하는 그런 흔한 죽음이 아니다. 영화 자체가 온전히 죽음만을 응시한다. 죽음이 주제이며 소재이다. 영화를 통째로 죽음에 헌사한 것이다.
<나라야마 부시코>에서의 죽음은 곧 생명이다. 공동체의 존립을 위한 생명의 순환으로서의 죽음이다. 늙은 자기 부모를 산속 깊숙한 곳에 떨구고 돌아서는 아들이나, 해골들이 사방에 뒹구는 곳에서 자신의 죽음을 조용히 맞이하는 부모나 모두 한 없는 고통이겠지만 그것을 견뎌내야만 한다. 죽음은 성스럽고 아름답다. 생명의 완성이다.
<체리향기>에서의 죽음은 허무이다. 종교도, 도덕도, 친절한 설득도, 달콤한 체리향기도 그 허무를 앗아가지 못한다. 언뜻 고통스러운 것 같지도 않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것 같지도 않다. 허무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의 무덤을 파고 그 안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그 지독한 허무의 실체는 무엇일까? 당연하다. 허무는 '무(無)'의 확장이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허무를 정복할 수가 없다.
<엉클 분미>에서의 죽음은 회귀이다. 불교적 세계관의 환생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여행이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과 유령들이 모두 그의 죽음 여행을 마중한다. 그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단지 산 사람들은 그를 온전히 보내고 생경한 생활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여전히 죽음은 가까이 있다.
<아무르>에서의 죽음은 곧 사랑이다. 남편은 죽음을 기다리는 아내를 베개로 눌러서 어렴풋이 남아있던 생명을 끝낸다. 아내는 마지막 순간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남편의 손길을 이끌어낸다. 생명은 우악스럽게 저항한다. 생명이 남아 있다는 것이 어느 때에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고통이다. 존엄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는 더 현명한 방법은 없는 것일까? 사랑은 그렇게 절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