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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Feb 12. 2022

코피

- 단지 미래의 기억

그는 갑자기 코피를 흘렸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어설픈 손장난을 한 것은 단연코 아니었다.

코피는 멈추지 않았다.

휴지로 틀어막어도 금방 휴지가 피로 질척하게 적셔졌다.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피를 코로 들이마시고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삼켜 넣었다.

그러던 코피가 어떻게 멎었는지는 그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단지 병원을 찾지는 않았다는 것만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

대략 20년 전쯤의 일이었다.

그가 그 기억을 떠올린 것은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를 보던 중이었다.

주인공 고르차코프가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코피를 쏟았기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의 1983년 영화 <노스탤지어>의 한 장면

코피가 터진 하루 전인가, 아니면 이틀 전인가, 아니면 며칠 후였을 지도 모른다.

그의 통장 하나에 6천 원 정도가 남아 있고, 또 다른 통장에는 7천 원 정도가 남아 있었다.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체를 해서 경우 1만 원을 출금할 수가 있었다.

그것으로 차비를 만들어 어딘가에 갔다.

코피 사건과 통장이 바닥난 사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두 가지의 사건은 늘 붙어 다닌다.

타르코프스키의 1983년 영화 <노스탤지어>의 한 장면

피는 생명의 올갱이지만 사람들은 피를 통해 죽음을 더 많이 연상한다.

피가 붉은 이유는 너무나 생명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생명이 원하는 것은 보다 왕성한 생명이다.

하지만 끝없는 생명의 충동은 죽음을 가져올 뿐이다.

타르코프스키의 1983년 영화 <노스탤지어>의 한 장면

생명은 불과 같다.

때론 너무나 연약해서 조그만 바람에도 꺼져버리지만 때론 모든 생명을 재로 만들 만큼 강력해진다.

촛불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도 너무나 큰 조바심이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는 불을 생명과 같이 생각한다.

하지만 그 불은 어느새 생명 그 자체가 되어 생명을 앗아간다.

시커멓고 추한 재는 불의 생명력이 남긴 그림자이며 감출 수 없는 생명의 흔적이다.

타르코프스키의 1983년 영화 <노스탤지어>의 한 장면

혁명이 사라진 후 그는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삶은 그에게 건널 수 없는 물웅덩이와 같았다.

누구나 쉽게 첨벙거리며 건너갔지만 그는 쉽지가 않았다.

불꽃의 잔혹한 유혹만이 늘 혀를 널름거리며 그의 정강이를 붙들었다.

타르코프스키의 1983년 영화 <노스탤지어>의 한 장면

그에게 미래는 오직 기억 속에만 있었다.

움직임이 없이 못 박힌 채 희미한 안개처럼 그를 맴돌았다.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

미래의 기억은 그의 삶의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는 과거를 향해 걸어들어갔다.

그것만이 그를 붙잡는 미래의 기억을 지울 수 있었다.

타르코프스키의 1983년 영화 <노스탤지어>의 한 장면

(이 글은 영화 <노스탤지어>와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단지 코피만 관련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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