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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혼돈의 영토

by 로로 Feb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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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화가였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집에 놓인 명화 화집이나 전시회 도록을 숱하게 보았다. 그래서인지 나름 미술에 안목이 있다고 자부한다. 그렇다고 전문가적인 식견이랄 수는 없다. 2015년 마크 로스코 전시회나 2019년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회를 구경 가기는 하지만 솔직히 나는 그 미술품이 품고 있는 문화적 정신적 영토를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로스코나 호크니와 유사한 2류 작가의 그림을 대신 전시해 놓았더라도 나는 분별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이러한 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리면 쉽게 20만 관객은 넘기는 게 보통이다. 난 이게 참 신기할 따름이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큰 로스코의 그림은 바로 눈앞 30센티 이내에서 관람을 해야 한다고 작가가 말했다. 그리고 거기서 ‘숭고’라는 가치를 미적, 정신적으로 체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숭고’라니. 이 말처럼 어려운 것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20만 명 중 과연 몇 명이 그러할까? 물론 그 답은 단순하다. 그들도 나처럼 그저 유명한 작가라니깐, 엄청나게 비싼 가격의 그림이라니깐 기다림의 긴 줄을 마냥 서서 빽빽한 관람객에 기꺼이 끼어보는 것이리라. 사실 거기서 굳이 ‘숭고’의 미적 체험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이벤트적인 광경 자체가 하나의 문화이고 그런 문화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Violet, Black, Orange, Yellow on White and Red>(1949)마크 로스코(Mark Rothko) <Violet, Black, Orange, Yellow on White and Red>(1949)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 1967)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더 큰 첨벙>(A Bigger Splash, 1967)


현대미술이 관람객의 눈을 떠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끊임없이 그들 나름의 예술적 영토에서 형식적 실험을 거듭하며 발전시킨, 보통 사람들에겐 안개와 미몽일 뿐이지만 당사자들에겐 사투의 혈흔인 현대미술의 결과물들. 과연 그 세계를 보통 사람들이 접근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현대미술의 모든 흐름을 꿰뚫고 그 미학적 세계를 ‘연구’하는 수준이 되어야 아마도 비로소 그 미술을 ‘감상’할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 될 터이다. 물론 이러한 일들을 비평가나 연구자들이 대신해 주고 우리는 그들의 결론을 믿고 “그런가부다” 하고 받아들이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 또한 부질없는 짓이긴 하다. 과거의 미술사를 슬쩍 들여다보아도 당대의 미술평론가에 의해 제대로 평가된 화가는 드문 편에 속한다. 즉 미술 작품에 대한 평가 자체가 매우 유동적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미술에는 평가를 쉽게 뒤바꾸기 힘든 단단한 받침대가 있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그것은 자본이다. 유명 작가의 작품에는 이미 엄청난 자본이 투자되어 있다. 따라서 거기에 투자한 큰 손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미술품의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미술의 관람객은 비평가와 자본이 만들어 놓은 높은 카프카의 성(城)을 그저 ‘우와!’하는 당연한 감탄사를 곁들여 바라볼 뿐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사실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다 아는 이야기다. 나의 진짜 관심사는 다른 쪽에 있다.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로스코나 호크니 대신에 보통 사람들이라도 쉽게 이해하고 거기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나름 미적 체험을 하고, 기쁨이나 행복감 같은 감정의 충만을 얻고, 그런대로의 정신적 자양분을 얻을 수 있는 미술품은 서울 시내 곳곳에서 매일 전시되고 있다. 인사동이든 압구정동이든 서울 시내에만 수백 곳의 미술 전시장이 있고 매일 미술품이 전시되고 있다. 거기에는 수준 이하의 전시 작품도 간혹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전문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의 작품이고 거기서도 충분히 미적 만족감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러나 과연 누가 이런 곳을 굳이 찾아가는가? 지인이나, 학생이나, 관계자들뿐 늘 썰렁하기만 하다. 왜 사람들은 기다릴 필요도 없고 여유 있는 공간에서 느긋하게 그것도 ‘공짜로’ 미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이런 곳을 외면하고 시장바닥 같은 곳에 수 만원씩을 주면서 이해하지도 못할 초유명 작가의 초고가 작품만을 찾아가는 것일까?


사실 이것도 뭐 답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관람객에게 중요한 것은 미적 정신적 체험이 아니라, 어떤 이벤트 현장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의미한 것이 아님은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문화 현상은 그것 자체의 논리가 있고 고유한 의미를 생산한다. 문제는 또 다른 문화의 현장에서는 놀라운 역전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바로 영화에서 그러한 반전이 벌어진다.


미술계의 로스코나 호크니 이상으로 영화계에서 유명한 예술 작가, 예를 들면 벨라 타르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개봉하면 몇 명이나 보러 갈까? 거기까지가 아니라도 흔히 ‘아트시네마’라고 분류되는 작가 중 그런대로 대중성이 있는 제인 캠피온, 폴 토마스 앤더슨, 페드로 알모도바르, 아쉬가르 파라디 등의 영화가 개봉되면 과연 몇 명이나 관객이 모일까? 미술전시장과 비교하여 영화관이 훨씬 접근성이 쉬운 대도 불구하고 몇만 명을 넘기기가 쉽지가 않다. 아무리 영화평론가가 좋은 작품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도 대중의 외면은 돌이켜지지 않는다. 이해할 수도 없는 로스코와 호크니를 기꺼이 관람하던 그 문화인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 대신 전문가나 평론가들이 형편없다고 평가하는 영화에는 때론 구름떼처럼 관객이 몰려든다. 왜 미술에서는 통하는 예술적 평가의 규준이 영화에서는 철저히 무시되는 것일까?


종종 영화 역사상 10대 영화의 하나로 꼽히는 벨라 타르(Bela Tarr) 감독의 영화 <사탄탱고>(Satantango, 1994)의 한 장면종종 영화 역사상 10대 영화의 하나로 꼽히는 벨라 타르(Bela Tarr) 감독의 영화 <사탄탱고>(Satantango, 1994)의 한 장면
종종 영화 역사상 10대 영화의 하나로 꼽히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안드레이 류블료프>(1966)의 한 장면종종 영화 역사상 10대 영화의 하나로 꼽히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안드레이 류블료프>(1966)의 한 장면
제인 캠피온(Jane Campion) 감독의 영화 <더 파워 오브 더 도그>(The Power of the Dog, 2021)의 한 장면제인 캠피온(Jane Campion) 감독의 영화 <더 파워 오브 더 도그>(The Power of the Dog, 2021)의 한 장면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감독의 영화 <리코리쉬 피자>(Licorice Pizza, 2021)의 한 장면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감독의 영화 <리코리쉬 피자>(Licorice Pizza, 2021)의 한 장면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óvar) 감독의 영화 <페러렐 마더스>(Madres paralelas, 2021)의 한 장면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óvar) 감독의 영화 <페러렐 마더스>(Madres paralelas, 2021)의 한 장면
아쉬가르 파라디(Asghar Farhadi) 감독의 영화 <히어로>(Ghahreman, 2021)의 한 장면아쉬가르 파라디(Asghar Farhadi) 감독의 영화 <히어로>(Ghahreman, 2021)의 한 장면


이에 대한 답도 사실은 간단하다. 전시장을 찾는 사람은 고상한 ‘예술’에의 ‘참여’를 기대하지만, 영화관을 찾는 사람은 그저 ‘문화상품’이 제공하는 ‘재미’만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영화라는 문화의 한 생태계가 태생적으로 그것을 낙인처럼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현대미술을 우두커니 보며 몽매에 빠지는 대신에 훌륭한 예술 영화를 보는 것을 통해 비교적 쉬운 방법으로 가치 있는 문화적, 미적, 정신적 체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싫다는 데는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서 나는 두 가지의 상상력을 덧붙여서 이 문제를 건드려보고 싶다. 만약 필름(film)이 복제 불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딱 하나의 필름만으로 영화가 유통된다면 어찌 될까?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글로벌 그루브>는 백남준아트센터의 <TV정원>이란 작품 주위를 계속 떠돌아야 관람할 수가 있고, 아이작 줄리언의 <만 개의 파도>라는 기념비적인 비디오아트 작품은 특별히 설치된 미술관에서나 관람할 수 있듯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2021년 영화 <메모리아>가 딱 하나의 필름만으로 관람이 가능하고, 그 필름은 수 천억 원에 팔려나간 것이며, 그것이 어렵사리 국내에서 상영이 된다면 그 이해하기 힘든 영화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모여들까? 아마도 로스코나 호크니의 전시장 이상으로 북새통이 될 것이라고 나는 상상한다.


백남준의 <지구의 환희>(Global Groove, 1973)가 재생되는 <TV 정원>백남준의 <지구의 환희>(Global Groove, 1973)가 재생되는 <TV 정원>
아이작 줄리언(Isaac Julien)의 <만 개의 파도>(Ten Thousand Waves, 2010)아이작 줄리언(Isaac Julien)의 <만 개의 파도>(Ten Thousand Waves, 2010)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 감독의 영화 <메모리아>(Memoria, 2021)의 한 장면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 감독의 영화 <메모리아>(Memoria, 2021)의 한 장면


또 다른 상상을 해본다. 미술품의 3D 복제 기술은 이제 귀신이 곡할 만큼 발전했다고 한다. 아마도 조만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실물과 99% 이상 똑같은 색감과 질감을 가진 복제품을 만들어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미술품들을 이곳저곳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고 치자. 마치 OTT 세상에서 옛날의 명작 영화들도 그런대로 찾아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런 세상이 돼서 다빈치든 로스코든 호크니든 마음만 먹으면 쉽사리 가서 실물과 99% 이상 똑같은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고 치자. 사람들은 그것을 구경하러 갈까? 대략 부정적이라고 본다. 거기에는 이미 사회적(문화적이 아니다) 만족감을 제공해주는 문화적 ‘이벤트’라는 현장감이 소실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굳이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aura)’를 호출하는 것은 좀 구차스러운 일이다.


결국 남는 문제는 문화가 무엇이고, 예술이 무엇이고,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다시 직면하게 된다. 나에게 예술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 아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인상적인 한 문단으로 나의 결론을 대신한다.


모든 예술은 혼돈과의 유희요 혼돈에 대한 싸움이다.
 예술은 언제나 혼돈을 향해 점점 더 위태롭게 다가가서
더욱더 넓은 정신의 영토를 그로부터 건져오는 작업이다.
예술사에서 진보가 있다면
그것은 혼돈으로부터 탈환해온 이러한 영토의 끊임없는 확대를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러니 애당초 세상이 반듯하고 올곧게만 보여 혼돈과 직면하여 그와 씨름할 필요가 없다면 예술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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