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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벌들>

2024, 드미트로 모이세예프

by 로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와서 돌아다니니 부산 방언을 쓰는 사람을 그 말투로 단박에 알 수가 있다. 아마도 <회색 벌들>을 보는 우크라이나 사람은 두 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그들의 말투만으로 한 사람은 러시아 출신이고 한 사람은 우크라이나 출신임을 금방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관객은 이 두 사람이 가까운 이웃이면서 왜 처음부터 무뚝뚝한지를 알려면 좀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2022년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한참 전인 2014년부터 도네츠크 지역을 중심으로 사실상 전쟁 중이었고 그때는 우크라이나 군과 친러 민병대간의 전투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영화의 내용에 대한 상황판단하기가 좀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우크라이나의 국기를 모른다면 마지막 장면의 의미를 완전히 놓치고 말 것이다. 러시아 출신의 도네츠크 거주민인 양봉업자 주인공이 자신의 누리끼리한 벌꿀을 파란색 대문의 하단에 문질러서 우크라이나 국기를 만드는 장면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마지막 장면이 문제다.


그전까지는 민족적 정체성이 사람의 행동거지를 제약하지만 그래도 이웃이라는 또 다른 정체성이 미묘하게 작용하는 다소 얽힌 플롯으로 영화가 전개되는데 영화의 마지막에 특별한 설명이나 계기도 없이 주인공이 우크라이나 정체성으로 커밍아웃함으로써 영화가 갑자기 '선전영화'가 되어버렸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만 객관적으로는 좀 뜨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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