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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Sep 30. 2020

잡문3

슬픔의 병 = "자신이 누리는 건강하고 평범한 삶의 조건이 곧 타인의 고통 위에 서 있는 것임을 외면하지 못하는 병"(네이딘 고디머 <버거의 딸>에서)


슬픔의 사회 = 이러한 '슬픔의 병'을 속으로 앓는 사람이 점점 사라져가는 사회


자신이 백만 명 속의 한 사람이 되면 자신이 백만으로 확장됨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백만 명에 속하면 자신이 백만 분의 일로 쪼그라든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


후자에 속하는 전형적인 인물들이 언론이 깔아준 자리에서 나불거리는 모습은 가련하다.


불행한 일이지만 민주주의는 선거, 절차, 참여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권력'을 다루는 문제인데, 그 권력이란 놈이 너무나 달콤하고 중독성이 있어서 무한 욕망, 무한 증식을 하며 양심이든 정의든 뭐든 다 집어 삼키려 한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분권을 통한 '견제'를 할 수 밖에 없다. 말이 견제지 실상은 민주주의의 가장 야만적이고 동물적인 특성이다.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어떤 견제도 거부하는 검찰의 작금의 행태는 거의 민주주의를 질식시킬 태세이다.

이들의 응집력과 안하무인의 배타적 권력욕은 지구상의 어떤 깡패, 마피아보다도 강력해 보인다.


발행일이 2019년 9월 30일인 책을 샀다.

영화로 치면 개봉 첫 날 본 것이나 다름 없다.

과거에 이런 예는 거의 없었다.


요즘 미술에 대한 책을 보고 있고,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상을 받은 줄리언 반스가 대단한 이야기꾼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서슴 없이 주문했다.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이제 서문을 다 읽었는데 반스와 내가 아주 기묘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빙그레 웃었다. (초등학교 2학년쯤 세 번째 동방박사 역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극 무대에 섰다는 공통점.)


2019. 그때 우리는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좌우익,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누구든 자신의 실제 위치와 생각을 일치시키기 힘들었다. 

보수는 한발짝 움직이고 한마디 아우성칠 때마다 스스로 박근혜화의 수렁에 빠져드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진보는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운 지난 촛불혁명이 사실은 모든 결정권을 사법부에 위임한 

보수주의 혁명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로 인해 선출되지 않고 선출될 필요도 없는 보수주의 기득권 세력이 

선출된 권력을 유린하는 사태에 우왕좌왕했다. 

아니 다소곳했다. 


"권력은 법과 질서가 아니라 거친 파도와 꿈틀거리는 생물이다. 

민주주의는 말한다. 

권력은 나에게 있다고. 나의 참여에 있다고."


[사는 이유]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행복해서도 아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다

기쁨, 슬픔,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무엇을 향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다

남겨진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름이 있어서가 아니다

몸의 생명력에 굴복해서가 아니다

단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내 삶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망각만이 생을 중지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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