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한강읽기

한강의 <노랑무늬영원>을 읽고

- 파노타르시스 panos + katharsis

by 로로

이 글은 책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그저 한강의 작품을 읽으면서, 특히 이번 <노랑무늬영원>을 읽으면서 조금씩 뻗어 나간 온갖 잡생각이다.


일단 나는 한강의 작품을 보면서 하나의 조어를 만들어냈다.

그리스 비극에서 '카타르시스'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정화한다는 뜻이다.

한강의 작품은 슬픔보다는 고통 그 자체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그 고통을 접하고 독자는 슬픔으로 반응하기보다는 고통 자체를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 타자의 고통에 감정이입하면서 마음을 정화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어 고통(panos)과 카타르시스(katharsis)를 결합하여 '파노타르시스(panotharsis)'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공감하거나 말거나...)


내가 앞서 읽은 두 권의 책 <작별하지 않는다>와 <소년이 온다>는 '죽음'이라기보다는 '죽임'을 다루고 있다. '죽음'은 모든 생명의 본질이지만 '죽임'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발명품이다. 자기 종을 죽이는, 그것도 끝임 없이 대량으로 죽이는 종은 인간종밖에는 없다. 그러니 '죽임'은 인간의 발명품이다. 포유류 중 죽을 것 같은 동료를 뒤에 버리고 가는 그래서 사실상 그 동료를 죽이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인간의 인간에 대한 죽임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4.3과 5.18를 다룬 위 두 작품을 통해 한강은 이러한 '죽임'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해부하고 그에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또 다른 본질을 찾아낸다.


그런데 '죽음' 그 자체는 한강이 가장 사랑하는 사태이다. 죽음은 안정이고, 구원이고, 회복이다. '파란 돌'이다. 그런데 죽음을 '사랑'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그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자꾸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 자기가 죽으면 그 사랑도 끝나기 때문이다. '파란 돌'을 죽음의 사태라고 본다면, 그 돌을 만지려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죽임'이 인간종의 발명품이라면, 죽음을 뒤로 미루는 것, 그러니까 생명을 지속시키는 것도 또 다른 인간의 발명품이다.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생명의 수명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인간처럼 자기 종의 생명 지속 시간을 인위적으로, 극적으로 연장하는 경우는 없다. 다시 말해 죽음을 인지하게된 인간종은 그 죽음을 철저히 거부하려고 한다. 현대 사회의 모든 고질적인 문제들의 중심에는 인간이 자기 종을 죽이는 '죽임'의 문제와 생명의 인위적 연장(즉 죽음 거부) 문제가 놓여 있다.


인간종의 발명품에는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무한"한 욕망이다. 모든 생명은 더 큰 생명에 대한 욕망을 가진다. 아니, 이 말은 동어반복이다. 생명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더 큰 생명에 대한 욕망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 "더 큰 생명에 대한 욕망"이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생명이 아니다. 생명을 지속할 수도 없고, 종을 번식할 수도 없고, 또 진화할 수도 없다. (그냥 흐르는 물 아래 차갑게 몸을 맡기고 있는 파란돌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의 욕망에는 일정한 제약과 한계가 있고 거기에 순응하며 존재한다. 그런데 인간종은 "무한한 욕망"을 발명해 냈다. 앞서 말한 죽임과 죽음 거부도 결국에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의 부산물일 터이다.


인간종에 모든 고통을 야기하는 "죽임"과 "죽음 거부"라는 문제를 뛰어넘으면서(혹은 뛰어넘기 위해) 한강은 '죽음'을 사랑한다. 죽음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고차원적인 인간의 자기 초월이다.


인간이 자의식을 가지면서 죽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다른 동물도 죽음이라는 사태를 아는 경우가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자의식을 가진 인간만이 죽음을 제대로 인지한다. 여기서 인간종의 모든 불행이 탄생한다. 근대 이전에 죽음은 오로지 공포의 대상이었다. 인간의 극히 일부만이 자기 수명만큼 살다가 죽고 대부분은 죽임을 당하거나 굶어 죽는 오랜 역사 속에서 죽음은 오롯이 공포의 대상이고 신의 형벌이었다. 그러니 대부분의 종교는 이러한 죽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뛰어넘는 (거짓)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또 다른 차원, 생명과 함께 존재하는 차원, 즉 실존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을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문제는 (인위적인) '죽임'과 (인위적인) '생명 연장'이라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고통을 극복하고 초월할 때에만 가능하다.


인간의 궁극적인 자기 초월로서의 죽음을 한강이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한강 작품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불편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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