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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Oct 03. 2020

잡문5

전혀

볼 필요가 없는 영화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두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

때론 그리 무의미하지는 않다.


결코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책이란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이틀 간 씨름하는 것도

나름 필요한 일일 터이다.


종래엔

별 의미 없고 허망한 것임을

확인하기 위해

한 평생을 아득바득 살아보는 것은

무가치한 일은 아니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참 고되다.


문화산업을 문화로 읽으며,

요행과 퇴행의 시장적 승리를 보고,

민족적 또는 국가적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한다는,

그런 이야기가,

때론 믿음직스러운 사회의 지도자 입에서 나올 때만큼,

문화적 수치심을 느끼는 때도 없다.


5.18

처절하게 당했기 때문에

그날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견결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그날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으로의 도피]


고통에 대한 공포.

한없이 작은 고통에 대해서마저도 느끼는 공포.

혐오와 적의에 대한 떨칠 수 없는 불쾌감.

자기보존 본능이 지시하는 무저항.

접촉에 대한 두려움.

모든 접촉에서 너무나 깊이 받게되는 느낌.

차갑고 딱딱한 돌을 만졌을 때의 그 민감한 촉각.

고통과 자극에 대한 극단적인 감수성.

고통으로부터의 도피.

고통의 내면화.

그것은

사랑으로의 도피.


[인권과 돈]


기독교(가톨릭 포함)의 "세상 끝까지 가서 말씀을 전하고 구원"한다는 소명감이 서양의 제국주의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대략 상부상조하며 제국주의의 길을 소프트하게 터주는 역할을 한 것은 오늘날 바보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책을 읽으면서 이러한 기독교의 '구원'이 세속화되어 '인권'으로 대체되어 세계의 곳곳에서 서구의 패권 전략에 이용되고 있다는 내용을 접하고 쉽게 동의하기 힘든 것은, 그 인권에 문화적 다양성이 종종 무시되고 있더라도 인류의 역사가 어렵게 어렵게 어렵게 이루어 놓은 소중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깊히 생각해보면 그 인권에 "모든 사람이 '실질적으로' 인간답게 살 권리"가 포함되지 않는 그저 개인의 추상적 권리의 집합일 경우 위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형식적인 공화국도 되지 못한 왕조국가 사우디에서 벌어지는 인권 문제에 국제사회에서 아무도 토를 달지 않고 개인적으로 토를 달다가 왕족에 의해 백주에 외국에서 살해를 당해도 쉬 묻혀버리는 이유는 사우디의 석유와 거기서 축적한 엄청난 돈으로 매년 미국의 무기상을 배불려주기 때문이다.


미국이 자신들의 이해와 부딛히는 세계 곳곳에서 인권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때의 인권이란 돈으로 살 수 있고 돈으로 대체될 수 있는 인권일 뿐이다.


돈으로 대체될 수 없는 인권이 되려면 거기에 "모든 사람이 '실질적으로' 인간답게 살 권리"가 포함되야만 한다.(이것을 제일 못하는 나라 중의 하나가 미국이다.) 나는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할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이상한 자랑, 그리고 소박한 꿈]


"나는 이상한 엄마, 아빠를 만나서... 자기들은 명문대 나왔으면서, 나한테는 공부하라, 대학가라, 말 한마디 하질 않아서, 결국 대학도 못갔어."


아놔~. 이게 아들놈의 말이다.


자기는 공부는 싫다고 대학 안가겠다고 당당히 말한 후 군대를 갔다 와서는 여기저기 알바하면서 근근히 지대다가 뭔 동기가 작동했는지 6개월 빡쎈 컴퓨터 프로그래밍 학원을 열심히 다닌 후, 취업을 마다하고 공부를 더해 학위를 따겠다며 열심히 학점은행 공부를 하다가, 최근엔 학원에서 만난 선배의 주선으로 작은 소프트웨어 회사에 취직을 하고 방통대에서 학업을 계속하는 신통방통한 아들말이다.


그놈 말대로 공부하란 소리 단 한번 한적 없고, 집이 학원 안다니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요 PC방이 되어도 그러려니 하고, 일찌감치 대학 포기했을 때 아무 말도 안하던 아빠에겐 이런 아들이 그저 신비스럽다.


그래서 이제는 나의 교육철학을 괜히 정당화시켜본다. "믿고 지켜보기"라고.


그런데 이명박근혜 때 군대를 다니고, 방배동에 사는 친구들과 어울려서 그런지 세계관이 요즘 사회문제로 대두된 20대 남성의 전형적인 보수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그걸로 당당하게 자기 주장까지 한다.


솔직히 마음이 좀 무겁다. 대학 못가고, 취직 못하던 때보다 더 마음이 착잡하다. 그래도 여전히 "믿고 지켜보기"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태극기 들고 나가진 않겠지. 설마, 하면서)


한 10년쯤 세월이 흐른 후에 아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기를 소망하며...


"난 이상한 엄마, 아빠를 만나서 자기들은 진보면서 내가 20대 때 이상한 소리를 해도 다 들어주기만 하는 바램에 내가 그땐 완전 꼴통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라고.


[우디 앨런, 프랑소와 오종, 홍상수의 공통점과 차이점]


- 일년에 1~2편 영화를 만든다. 엄청난 다작이다.

- 모두 기본은 하며 태작은 거의 없고 종종 경이로운 수작이 있다.

- 너무 머리가 좋아서 그런지 간혹 관객을 가지고 놀려는 습성이 있다.

- 홍상수는 스타일이 고정적이고, 우디 앨런은 끊임없이 변주하며, 오종은 다채롭다.

- 홍상수는 인간의 찌질함(속물근성)을, 앨런은 가식을, 오종은 욕망을 잘 묘사한다.

- 2019년 개봉작(또는 개봉예정작)을 벌써 내놨다. 홍의 <강변호텔>, 오종의 <바이 더 그레이스 오브 갓>, 앨런의 <A Rainy Day in New York>

- 성과 젠더, 그리고 사생활 관련해서 종종 위태롭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적인 소비자본주의의 파괴력에 모든 미술 양식이 사실상 무릎을 꿇었을 때 아마도 미술계에서는 마지막으로 정치적 아방가르드 운동을 전개했던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핵심 인물인 덴마크의 화가 Asger Jorn(아스게르 요른)의 전시회가 동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것은 뜻깊은 일이다. 전시회의 소개에는 주류 미술이 아닌 "대안적 세계관"에 초점을 둔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게 왠 뚱딴지인가?


덴마크 화가 아스게르 요른을 짝퉁 영어식 발음인 '아스거 욘'('애스거 존'이라고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버젓이 표기하고 소개하고 있지 않은가? 많은 신문기사는 좀 황당했는지 전시회 포스터의 '아스거 욘'을 무시하고 기사 내용에 '아스게르 요른'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무슨 근거와 생각으로 영어식 발음으로 화가를 소개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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