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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라이브러리에서>(2017)

프레더릭 와이즈먼

by 로로

[5,494명에게 사랑과 존경을]


3시간 26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를 밤마다 30분씩 7일만에 "기필코" 다 보게 된 이유는 젊어서 한 때 New York Public Library 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추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거장 프레더릭 와이즈먼 감독의 또 하나의 마스터피스라는 세간의 평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 전에 보았던 와이즈먼 감독의 <내셔널 갤러리>를 보면서 형언하기 힘든 묵직함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4일째쯤에 접었을지도 모른다.


와이즈먼의 고집스런 다큐 철학은 너무나 완고하다. 개입하지 않는다. 연출하지 않는다.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한 화면은 0.1초도 삽입하지 않는다. 무한히 관찰한다. 단지 '선택'하고 '배열'하는 것만이 다큐의 책임이다.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 나와도, 이름 없는 촌부가 나와도 어떠한 설명이나 자막이 없다. 당연히 나레이터도 없다. 놀라운 강연을 5분 이상 보여줘서 와~ 저 사람 누구지? 하는 마음이 들어도 절대로 안가르쳐준다. 엔딩 크레딧에 잠깐 나오고 만다.


영화 포스터의의 "잔디밭의 독서"를 보면서 독서에 대한 어떤 산뜻한 로망을 주겠거니 하며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글쎄... 3시간 26분을 견뎠을 것 같지가 않다.


이 영화는 현대 사회에서의 라이브러리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포괄적 조망을 한다. 책을 보관하는 곳만이 아니라, 지식을 소통시키고 교육을 확장하고 나아가 사회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는 곳으로서의 라이브러리. 그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돌아가고 무엇이 문제인지,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여기서 입체적이란 책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영화 전편에 계속 언급되는 예산을 둘러싼 공무원들과의 씨름, 또는 시설 보수는 어떻게 진행되는 지 등등을 넘나든다는 뜻이다.


전작 <내셔널 갤러리>에서 카메라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은 딱 한 군데 마지막 미술관에서의 현대무용 장면뿐이다. 여기엔 관객이 없기에 오롯이 카메라만을 위한 춤이었음을 뜻한다. 그리고 와이즈먼 감독이 굳이 강조하려던 다큐의 주제는 이 카메라의 개입 장면에 숨어 있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이런 식의 개입은 없다. 단지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포스터의 그 낭만적인 잔디밭 독서 장면에 "개입"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영화 전편을 통해 인위적인 배경음악이 유일하게 사용되는데, 그것이 하필 스콧 조플린의 The Entertainer(영화 <스팅>의 주제음악)이다. 감독의 의도가 좀 야리꾸리하다.


한발짝 더 들여다보면 이 영화는 Library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Public에 대한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공공성의 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되어야 하는지를 탐색한다.


리처드 도킨스로 포문을 연 라이브러리의 강연은 뒤로 갈 수록 노동과 흑인의 문제에 집중해 나간다. 쉽게 말해 좌빨이 되어간다. Public은 공허한 개념이 아니라 '뉴욕'이라는 현실 사회에서 구현되야 하는 구체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마지막 두 씬의 대비가 압권이다. 이건 이 영화에서 와이즈먼 감독이 노골적으로 '개입'한 유일한 부분이다. 달랑 10명이 모인 흑인의 커뮤니티 모임에서는 매우 진지하고, 무겁고, 가슴 아프고, 답답한 심경의 토론이 이어진다.


그 다음 마지막 장면은 주로 백인들이 눈에 많이 띄는 수 백명의 청중이 큰 강당을 가득 매운 상태에서 매우 추상적이고 현학적이고 젠체하는 한마디로 "뭐라카노" 스타일의 강연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블랙아웃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본 5,494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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