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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시스>(2002)

이창동

by 로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기 행동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라고 영화 <오아시스>에서 주인공의 형이 말하는데 그 형은 자기 행동(운전중 과실치사와 뺑소니)에 대한 책임을 동생이 지는 것에 동의한 사람이다. 사실 영화를 통해 알 수있듯이 책임을 진다는 것은 현실과 적절히 잘 타협해서 사는 속물이 된다는 것이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문소리 역)과 중증 날건달(설경구)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이들은 그런 책임 있는 속물들이다. 영화는 장애인이 처한 현실을 강조하기 위해 전형적인 과장된 시추에이션을 동원하기는 커녕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애인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성숙되어있다. 누구도 비하 발언을 하거나 혐오감을 표현하지 않는다. 동정적이며 주어진 조건에서 매우 현실적이다. 장애인 학교가 동네에 들어서면 난리법석을 떠는 우리 '실제' 사회 현실에 비한다면 등장인물들은 매우 성숙한 인간형이다. 그들의 속물성은 곧 책임성으로 등치될 수 있을 만큼 아이러니하다.


여기에 가장 하등한 존재인 날건달 설경구가 등장하는데 이 인간은 그 행동거지 수준이 일본영화 <기쿠지로이 여름>에 나오는 기타노 다케시가 연기한 주인공 기쿠지로 만큼이나 대책이 없다. 그런데 이 인간만이 유일하게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으로 뇌성마비 장애인과 인간적인 소통을 한다. 이건 끼리끼리 논다는 차원도 아니고, 장애인도 사랑을 할 수있다는 인간승리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왜, 무엇 때문에, 어떤 배경이 있기에 설경구가 뇌성마비 장애인과 단순한 연민을 넘어선 인간적 소통을 하게 되는지 설명이 없다. 그냥 본능적이다. 누구 물어도 대답이 없다. 뇌성마비 장애인과 연애를 하는 설경구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서 설경구는 특별히 항변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물 흐르듯이 받아들인다.


영화 <오아시스>는 여기서 더 나가지 않는다. 그 해답은 관객이 스스로 찾아야한다. 철들지 않은 날건달 설경구는 왜 본능적으로 중증 뇌성마비 환자에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 대상에 대한 연민으로서가 아니라 주체와의 소통을 할수 있었을까?


이창동도 그 해답을찾지 못하고 '오아시스'로 추상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코키리와 원주민 여인과 소년, 그리고 뇌성마비가 없는 문소리와 설경구가 한껏 어울려 춤추는 오아시스 세상이 오려면 그것을 늘 가로막는 검은 그림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제법 그럴듯 하긴 하지만 만족스러운 답은 아니다.


1~2년전 주민센터에서 무엇인가를 처리하는데 그 담당자가 뇌성마비 장애인이어서 글씨를 쓰고 도장을 찍는데 아슬아슬 하고 시간이 걸렸다. 나는 그 기다림의 시간이 오아시스 같았다. 그럼 나도 날건달 수준이 된 것일까? 아직 턱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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