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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Oct 03. 2020

잡문8

고통이 잦아드니

끄적일 말이

줄어든다.


글이란게

본래

아픔의 흔적인듯.


[내가 TV는 거의 스포츠만 보는 이유]


국가별로 온갖 지표를 조사해서 발표하는 OECD가 만약 '외모지상주의'라는 지표를 조사한다면 OECD 평균이 7~8이라면 우리나라는 타국의 추종을 불허하며 단연 1위로 70~80정도의 지표가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외모가 노동력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 인구 1만 명당 성형외과 의사의 수, 인구 1인당 성형에 투자하는 비용. 이런 정도만 조사해도 금방 나온다.


TV를 보면 구역질이 난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안된다. 뉴스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우리나라의 외모지상주의는 TV가 선도해 왔다. 특히 버라이어티쇼에 나름 개성있는 남성들 사이에 꽃처럼 장식으로 꽂아 놓는 여성 출연자를 보면 참담한 마음이 든다.


배우는 연기를 잘해야 하고, 가수는 노래를 잘해야 하고, 아나운서는 진행을 잘해야 한다. 이 모든 기준이 우리나라에서는 싸그리 무시되고 오직 외모가 최고의 기준이 된다. 결국 외모지상주의는 궁극적으로 국가경쟁력을 하락시킬 수밖에 없다.


적어도 스포츠 선수는 '아직' 외모가 기준은 아니다. 오직 그 분야에서의 실력만이 (혹은 연줄이 작용하지만) 기준이다. 나도 TV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토 나오지 않고 보고싶다.


[개 였구나]


해피가 다른 개와 어울려 하루 이상을 지낸 것은 처음이었다.

사회성이 부족해서 어떨지 궁굼하고 걱정도 됐다.

첫 대면에는 예의 킁킁거리며 서로의 냄새를 맡았다.


그 다음은,

서로를 노려보고 짖으며 서열 확인을 하였다.

노령견 해피는 몸집이 작았지만 이내 두살된 천둥이를 제압했다.

천둥이는 그후 하루 종일 해피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눈길을 돌렸다.


<교훈>

"눈 깔아!"

"뭘 꼬나봐?"

"뭘 쳐다봐?"

"저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는 것좀 봐!"


이런 말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족속들.

'개' 였구나!


스필버그는 영화를 "너무나" 잘만들어서, 나같은 삐뚜기는 감동하기 어렵다.

특히 그의 역사물은 '사실'이나 '해석'이 아니라 오로지 '감동'에만 촛점을 맞추어 하나의 방향을 향해 관객을 양떼 몰듯이 능수능란하게 몰고 간다. 때론 너무 인위적이라 농락당하는 느낌마저 든다. 그의 영화는 나쁜 영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은 영화도 아니다. 단지 재밌는 영화일 뿐이다.

최근의 <더 포스트>를 보고 들었던 양가적 감정이 어제 EBS에서 <쉰들러리스트>를 다시 보고 확실히 굳어진다.


<이건 시가 아니다>


내 시는 시가 아니다

왜냐면 난 시인이 아니니깐


난 시인 흉내를 내본다

왜냐면 난 시인이 아니니깐


시로밖에는 표현할 길 없어도 시가 안된다

왜냐면 난 시인이 아니니깐


궁색한 변명을 해도 된다

왜냐면 난 시인이 아니니깐


난 시인이 되고 싶지 않다

왜냐면 난 시인이 아니니깐


난 그냥 시가 되고 싶다

왜냐면 난 시인이 아니니깐


가장 나쁜 권력은

당연히,

횡포를 부리는 권력이다.


가장 위험한 권력은

의외로,

스스로에게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권력이다.


개선장군처럼 왁다글하게 쳐들어와서는

이내 내 머리를 완전 장악해 버린다.

이 놈의 개똥같은 온갖 잡스런 상념들.


이들을 물리치려고

바둑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페북을 만지작 거린다.

온갖 군데를 쿡쿡 찔러오는 잡념을 물리치려면 한 군데 집중을 해야하는데 이 집중은 결국 잠까지도 달아나게 한다.

이게 불면증이다.

잡념과의 일대 전쟁.

약 기운을 빌려 투쟁 강도를 높힌다.


그런데 어쩌면 불면의 주원인은 잡념이 아니라 '의식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인지도 모른다. 의식 상실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이러다가는 낭중에 영원히 눈을 감아야 할 때조차 끝까지 버티게 될까 두렵다.

까짓 의식. 걍 좀 내려놓자.


하나를 알면 10을 주둥이로 내뱉는 사람이 있다.

주변 사람이 짜증난다.


10을 알고 10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주변 사람이 귀를 솔깃하다가도 종종 지겹고 피곤해진다.


10을 알면 꼭꼭 씹어서 삼킨 후 전혀 다른 형체로 1을 발하는 사람이 있다.

종종 답답하기도 하지만 기다려진다.


1. '공공성'은 자본주의에서 취할 수 있는 공동체적 정의의 맥시멈이다.

2. '공공성'은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이를 더 확장시키며, 시장경제를 통해 개인의 파편화를 극단화 한다.

3. (반전)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통과하지 않고는 진정한 공동체성은 불가능하다.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킨 전근대적 공동체는 현대사회의 인권에 대립된다.

4. 현대의 '인권'은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하며 동시에 개인주의를 더욱 강화시킨다.

5. 따라서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은 '개인의 인권'을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한다.

5. 공동체성이 회복되고 평등의 가치가 실현되는 미래의 사회는 [철저히 파편화된 개인 > 근대적 공공성의 확장 > 개인 인권의 철저한 보장]을 통과해야만 한다.

6. 이를 위해 아직 갈길이 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에 따른 위계'의 해체이다.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다수와 소수, 가족 구성원(전근대적 존재의 위계가 가장 뿌리깊게 각인된 사회) 등이 존재에 따른 위계의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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