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로 Oct 03. 2020

천국에 사시던 분

아마 그분의 장례식장에 가지 못한 탓일 게다. 어제 아침 잠결에 그분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다가오셨다. 얕은 잠이어서 인지 순간 아~ 꿈이구나, 하는 깨달음과 동시에 잠에서 깼다.


내가 ㅎ교회로의 발걸음이 잦아들게 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아마도 한참 사회생활에 열 내던 시기였기 때문이리라. ㅎ교회의 장로였던 그분은 두 주에 한번, 그리고 또 한 달에 한번, 전화를 주셨다. 구찮거나 곤혹스럽게 하는 전화가 아니었다. 그저 안부를 묻고 보고 싶다는 말 정도를 다정하게 하셨다. 그렇게 7년을 보냈다. 내가 비록 20대에 교회에서 활약상이 좀 있었긴 해도 7년이라니...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10년만에 나에게 연락을 준 또래 친구로 인해 다시 ㅎ교회를 향한 발길을 잇게 되었다. 


그런데 좀 난처한 일이 있었다.


그때로부터 15년전 나는 ㅎ교회에서 많은 교인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을 했다. 그런데 발길을 끊은 사이에 배우자가 바뀌었다. 새로운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가니 혼란과 난처함과 곤혹스러움이 뒤죽박죽이었다. 특히 내가 직접 말로 설명하기 힘든 어르신들은 계속 헷깔려했다.


그런데 오직 딱 한 분의 할머니, 바로 그 장로님은 처음 인사를 한 순간, 정말로 놀랍게도 한눈에 딱 감을 잡고 아내를 아주 편하게 대해주었다. 뭐랄까? 인간관계의 귀재라고 할까?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이 만든 교회. 그 교회가 한풀 꺽여서 맥을 놓고 있을 때 혼신의 힘으로 교회를 지킨 분이 그분이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안병무 선생을 삼고초려 이상으로 붙들고 늘어져 ㅎ교회 강단에 서게 한 분도 그분이다. 그로인해 ㅎ교회는 70년대 대표적인 진보교회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후 통일운동에 헌신한 홍근수 목사에 등을 돌려 대부분의 장로들이 교회를 떠날 때 교회를 지킨 두 분의 장로 중 한 분이 그분이다.


그러던 분이 .... 벌써 7년은 됐을까? 치매가 왔다. 처음 문병을 갔을 때는 어떤 기억이 있는지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또 1년 후에 갔을 때는 전혀 기억은 못했지만 교회를 기억하고 계셨고 찬송가를 부르면 4절까지 정확히 가사를 기억하며 부르셨다. 또 1년이 지나서는 ... 더 이상 찬송가를 부르지 못하셨고 교회도 기억에서 지워졌다. 새하얀 백지 상태에서 마지막 남은 것은 어린이 같은 환한 미소뿐이었다.


종종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너무 선하고 훌륭한 분이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시면 그런 분을 위해 천국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분을 위해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분은 이 세상이 천국인 것처럼 사셨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천국의 느낌을 주변에 나누어주었다.


어제 아침 꿈 속에서 본 그분의 환한 미소는 바로 천국의 미소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진실과 공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