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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Oct 03. 2020

엄지발가락

- 한 괴랄한 이야기

작은 침대는 딱딱한 벽에 붙어 있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시커멓게 피멍이 들어 죽어가도록 그 벽을 차버린 것은 당연히 맨 정신에서가 아니었다. 새끼 호랑이였지만 감당키 힘든 놈이 나에게 다가왔고 나는 재빨리 있는 힘을 다해서 그 놈을 걷어 찼다. 그 호랑이가 어찌되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으스러진 엄지발가락을 감싸쥐고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여기까지는 인류사에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붕대를 감은 오른발로 또 그런 일이 생길까봐 그후 머리를 반대쪽으로 하고 잠을 잤다. 아마 정확히 일주일 후였을 것이다. 이번엔 새끼가 아니라 제법 큰 호랑이였다. 후다닥 달겨드는 놈을 이번엔 왼발로 강타했다. 용감도 하지! 이번엔 왼발 엄지발가락이 작살이 났다.


웃프게도 대칭이었다. 양쪽 엄지발가락의 시커먼 멍이 빠지면서 죽은 발톱이 다 빠지고 그 아래로 새로운 발톱이 자라나 자리를 잡기까지 6개월은 걸린 것 같다.



호랑이.

누군가는 길몽이란다.

문제는 그걸 걷어찼다는 것이다.

이런 '쌍발호란'을 일주일 사이에 경험한 사람이 인류사에 또 있을까 싶다.


꿈이 어떤 미래를 암시한다는 것을 믿지는 않지만 그후 1년간 벌어진 일을 반추하면 엄지발가락 수난은 분명 현실에 맞닿아 있다. 어쩌면 블랙홀 저편의 7차원 우주 어딘가에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1년 두 번에 걸쳐 삶의 위기가 찾아왔다. 기묘하게도 작은 호랑이와 큰 호랑이였다. 큰 호랑이가 공격했을 땐 감당키 힘들었다.


지금은 엄지발톱이 완전히 복원되었다. 그런데 예전의 내 발톱 같지가 않다. 두께가 두꺼워져서 발톱깍기로 깍기가 좀 힘들다.


"꿈 - 호랑이 걷어차기 - 엄지발가락 수난사"와 최근 1년 겪었던 삶의 굴곡을 관련지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막상 2018년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괴랄함이 머리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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