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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Oct 03. 2020

75세의 여성해방

쌀쌀한 공기가 가슴을 파고들 때 쯤이었다. 아버지를 땅에 묻고 나니 바로 추석이 찾아왔다. 


그때였다. 

어머니의 해방선언이 발표된 때가.


"이제 우리는 차례나 제사 더이상 안 지낸다", 라고 단호히 말하셨다.


안동 권씨 종가 출신의 자부심을 품고 계시며 유교적 예식에 까다로움을 더하셨던 어머니. 교회를 다니지만 제사문제까지 간섭받을 만큼 빠지진 않은 어머니. 결혼후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5대 종손가의 제사를 한번도 거르지 않은 분. 그런 어머니가 가정사의 최고 결정권자가 되시자마자 바로 선포한 것이 불가역적 제사금지였다.


예술가의 아내로 평생 생활이 힘들었지만 남편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잃지 않으신 분.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남편이 돌아가신 후 평생교육원에 등록해서 공부를 하시며 무척이나 행복해 하셨다. 더 일찍 이렇게 살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 하셨다.


아쉬움.

75세의 여성해방은 너무 늦었다.

어머니는 혼자로서의 정체성을 

채 만들어가기도 전에 속절없이 다가오는 '늙음의 전차'에 올라타야 했다.


여성해방 후 3~5년 동안 어머니는 책도 많이 읽었고, 신문도 꼬박 꼬박, 뉴스도 꼬박꼬박, 성서도 꾸준히 읽었다. 내가 방문하면 메모장에 빼곡이 적은 궁굼증을 펼쳐 놓아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첫 추석을 맞았을 때 어머니가 보여주신 그 모습은 평범한 한국 여성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극적인 변혁이었다. 나는 오직 그 순간에 옹골지게 터를 잡고 우리 어머니들을 본다. 하지만 방금 올라타신 늙음의 열차는 점점 속도를 올리리라.


사람들은 우리 이전 부모님 세대에게 여성의 삶이란 남편과 시부모와 자식들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해 왔고 그런 삶을 충실히 산 것만으로도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더이상 무엇이 필요했는지 묻지 않는다. 비굴한 침묵이다.


너무 늦어진다.

우리의 삶을 바꾸려면 당장 시작해야 한다.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일이라면 

온 가족이 함께 준비해야 한다.

만약 남성이 같이 하지 않으면 

일을 놓아야 한다.

명절파업.

이것이 출발이다.

더 늦기전에 당장 시작해야 한다.

75세는 너무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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