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난 2월 퇴사하고 코로나로 인한 고용시장 악화로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내가 원하는 조건의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구직활동을 잠시 접었다. 그동안 생각도 안 해봤던 공무원 시험공부를 해봤고 시험까지 보며 자발적 실업 상태로 5개월 정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7월부터 구직활동을 다시 시작하며 주변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고 다녔다. 대부분 직장인이었지만 그중 프리랜서로 일하는 언니도 있었다. 언니와 지내보면 자기 주관이 강하다는 점과 얽매이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나와의 공통점이 있었다. 언니는 정규직을 굳이 추구할 필요를 못 느끼겠고 대단한 대기업에 다니지 않더라도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돈을 버는 게 창피한 일도 아니라고 말했다. 언니는 동네 학원에서 전임 영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일하는 시간 대비 꽤 괜찮은 페이를 받고 있었고 언니 또한 지금의 라이프 스타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언니와의 대화가 고민 많았던 나의 구직활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그동안 안전지대, Comfort Zone,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기를 썼다. 남들과 같이 일반적인 사무직, 회사원, 적당한 적금과 연금보험을 들고 평생 20-30년을 한 회사에서 일하며 안정적으로 사는 삶 정도를 꿈꿨다. 우리 아버지가 살아왔던 삶의 모습이 많이 투영된 결과였다.
하지만 은퇴 후 아버지의 학력이나 30년 공기업 근무 경력은 무력한 스펙이 되어 버렸다. 직장인의 파워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회사의 이름에 달려 있고 플러스알파는 본인의 직책에서 나온다. 하지만 직장 밖으로 나왔을 때, 명함이 무의미해졌을 때,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직장인으로서 나를 찾는 이유는 내가 속한 회사 때문이고 그와 관련된 인맥과 정보, 이해관계 때문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절대 착각해선 안 된다. '나'를 찾는 게 아니라 '나의 소속'에 관심 있는 것이다. 언제나, 평생 파워 있는 조직에 몸 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언젠가는 세상 밖으로 개인으로서 나오게 된다. 아버지께서 30년 전 회사에 입사할 때와 30년이 지난 지금의 사회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신문기사를 읽는 것만으로는 현실감을 느끼기 어려우셨을 것이다. 아버지도 은퇴 후 재취업의 어려움을 겪으시며 적지 않은 당황스러움을 느끼셨고 아버지의 젊은 시절 단 한 번도 겪어보시지 않은 '서류 광탈'을 숱하게 당하시며 60대의 나이에 좌절감을 느끼신다.
나는 매일 9시간을 회사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사실이 삶의 너무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그동안 생각해온 ‘안전지대’ 말고 ‘이상지대’를 현실화해보기로 했다. 일단 근무 시간은 최대 6시간, 보수는 180~200만 원. 그리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출퇴근이 어렵지 않은 지역. 이렇게 크게 몇 가지 조건을 정해놓고 채용공고를 찾아봤다. 내가 원하는 조건의 채용공고가 딱 한 곳 있었다. 다행히 면접 제의 전화가 왔고, 바로 계약서를 쓰고 일하게 되었다. 내가 써둔 조건과 모두 맞아떨어졌다. ‘왜 풀타임이 아니라 파트타임으로 일하세요?’라고 묻기도 한다. 나는 풀타임으로 일하며 꽉 채워 일하고 몇 십만 원의 돈을 더 받는 것보다는 돈은 적게 받더라도 나머지 시간에 내가 프리랜서로 영어 수업을 하며 추가적으로 돈을 벌어도 되고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도 갖고 싶다.
그간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은 절대적인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내 삶을 보장해주는 직장은 없으며 어찌 됐든 내 삶은 죽을 때까지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영어 수업을 하면서 나만의 수업방식을 발전해갈 것이고 나만의 교재를 만들 것이다. 그것이 나의 생계를 이어갈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인 요리도 제법 괜찮은 수준으로 조금씩 발전시키며 나의 생계수단을 넓혀 갈 생각이다. 내가 원하는 시간만큼 일해서 돈을 벌고, 남는 시간에 요리를 하고, 맛있다고 소문난 디저트를 먹어 보고, 저녁 시간에는 매일 러닝 하며 사는 지금이 행복하다.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삶이기에 더욱 행복하다. 선택의 주체가 내가 되었다는 사실이 가장 뿌듯하다. 돈과 시간에 끌려다니는 삶이 아니라 내 선택에 따라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 앞으로도 이렇게 내가 꿈꾸는 삶을 위해 현실에 발붙이고 더욱 나만의 실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