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강사 생활을 오래 하여 개인 번호 노출되는 게 꺼려져 업무용 폰을 하나 더 만들었다. 이직을 할 때마다 카톡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계속 마주하기 싫어서 탈퇴와 재가입을 반복했다. 이제 2월부터 새로운 직장에 가게 되어 그간 탈퇴하고 있던 카톡에 다시 가입했다. 카톡엔 내가 저장한 연락처만 친구목록에 떴지만 예상치 못하게 "추천 목록"이란 게 따로 떠있었다. 내가 지웠던 사람들이 거기에 몇 있었다. 그 사람들의 카톡 프로필을 보자 잊고 있었던, 그들로부터 상처받았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학원 생태계는 한 곳에 오래 있기가 참 힘든 곳인데, 이것을 핑계로 하자면 두 달을 채 근무하지 못하고 나온 곳이 있었다.
하필이면 이곳 원장 영어 이름이 나와 똑같아서 원치 않게 다른 랜덤한 이름으로 바꿨다. 어느 학원을 가도 나와 이름이 겹치는 경우는 없었는데 이것부터 어긋남의 서막이었던 것일까.
내 성격 자체가 차분한 편이고 아이들과 얘기하는 건 좋아하지만 레크레이션 강사처럼 소리와 텐션 높여 놀이를 주도하는 수업은 매우 어려워한다. 수업 방식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덜컥 근로계약을 체결한 이 학원은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영어학원이었는데 나의 기본 목소리 톤에서 한 옥타브 정도는 높여서 수업을 해야 했다. 그게 원장님과 부원장님(둘이 자매)이 요구하는 무언의 조건이었다. 자신의 수업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다고 했다. 정말 마음속으로는 소주 한잔이라도 때리고 들어가야 하나 싶을 정도였지만 교육업 종사자로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어떤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는 수업보다도 어려운, 극악 난이도의 수업이었다. 기본적으로도 항상 나보다는 텐션이 높게 유지되는 아이들의 텐션을 더 높게 끌어올려줄 정도로 나 자신이 신나 있어야 했는데 그 당시 나는 평소보다도 마음이 많이 가라앉은 채 살아가던 때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더라도 굿판 벌이듯 신명 나는 수업은 못할 성격을 타고났다. 아무튼 그렇게 한 달을 넘게 적응해보려 했지만 내 목소리가 쉬는 만큼 내 마음도 금방 지쳐버렸다. 매일 출근하는 게 공포스러웠다. 그래도 해볼 때까진 해보자 싶어 매일 다음 날 수업에 하는 책들과 교구를 책을 챙겨 큼직한 수박 한 덩이 무게는 될만한 숄더백을 어깨에 이고 지고 오갔고 집에 가서는 쉴틈도 없이 수업 준비를 했다. 생각해 보니 이때부터 왼쪽 어깨가 고장 난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민을 거듭하다 마침 내가 이전에 일했던 스타일의 학원에서 채용공고가 났고 면접을 봐서 합격하여 이직을 통보하게 되었다. 원장에게 전화로 얘기를 했는데 원장은 나를 아주 책임감 없고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하는 식으로 몰아갔다. 아이들을 생각하자면 나도 미안했다. 하지만 나 먼저 살고 보자 하는 생각이 훨씬 컸다. 내 성격으론 절대 못할 일을 매일 할 엄두가 안 났다. 그렇게 이번주까지는 수업을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하고 출근했더니, 내 트레이닝을 담당하던 부원장은 내가 들어왔을 때 한 번 쳐다보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더니 "오늘부터 그냥 제가 수업할 거니까 책 놓고 가세요."라고 했다. 내쫓듯이 말하는 태도와 그녀의 날 선 앙칼진 목소리는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입구 데스크에 앉아 있던 원장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려고 기다렸다. 원장은 학부모와 통화 중인지 다른 곳만 응시한 채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인사를 받든 말든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왔다. 나도 미안한 마음으로 그만두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마지막 날을 문전박대당하듯 학원 문을 나서며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씁쓸했다. 사람 일이란 또 언제 어디서 인연이 닿을지 모르는 일인데 저렇게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로 마지막 인상을 남겨야 했을까 싶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학원을 그만두고 두 달 정도 후 앙칼진 목소리의 부원장으로부터 "선생님 요즘 일하고 계세요?"라고 문자가 왔다. 아마 강사 일손이 부족해서 어느 정도 수업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려고 연락한 게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읽씹을 때리고 싶었지만 "네"라고 한 글자만 보냈다. 나는 누구보다 학원 업계가 정직해지고 젠틀한 문화를 가지길 바라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을 겪어보고 나니 더욱 간절해지는 소망이다.
정말이지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매너는 밥 말아먹고 지금 생각해도 뚜껑 열리게 하는 사람들을 꽤나 많이 만났다. 왜 내 주변엔 항상 이런 사람들이 한 사람씩 반드시 끼어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그들의 태도를 보고 나는 내 뼈를 깎아내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도 저렇게 매너 없이 대하거나 저런 식으로 관계를 마무리 짓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벌써 대여섯 번의 이직을 했지만 어느 직장을 가든지 내 윗사람은 항상 저런 식이었다. 놀랍게도 모두 다른 사람이지만 별반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원래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지만 언제부턴가 기대와 설렘은 두려움으로 꽉 막혀 버렸다. 그럼에도 인생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매너 없는, 거지 같은 인성의 소유자를 또 만난다 해도, 그럼에도 한 걸음 내디뎌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이제는 시작부터 억지로라도 기대치를 낮춰서 들어간다. 정말 죽을 거 같은 정도가 아니라면 참아 넘겨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야 다음이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내 옆에, 내 주변에 평생 머물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넘겨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