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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o Nov 04. 2021

에밀리아 클라크가 겪은 두 번의 뇌 수술

By Emilia Clarke (Mar 21, 2019)

[저자 소개] ; 에밀리아 클라크 (Emilia Clarke)는 영국 런던 태생의 배우입니다. 2009년 데뷔 후 현재까지 많은 작품에 출연했으나, 무엇보다도 HBO의 인기드라마 '왕좌의 게임' (2011-19)을 통해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2016년 샘 클래플린 (Sam Claflin)과 함께 '자발적 안락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 장르 영화 '미 비포 유 (Me Before You)'와 2019년 헨리 골딩 (Henry Golding)과 함께 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라스트 크리스마스 (Last Christmas)' 등은 저 역시도 재미있게 본 작품입니다. 지난 2015년 영화 '터미네이터: 제니시스 (터미네이터 5)'로 처음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원문: https://www.newyorker.com/culture/personal-history/emilia-clarke-a-battle-for-my-life-brain-aneurysm-surgery-game-of-thrones



나는 [왕좌의 게임] 시즌1 촬영을 막 마친 즈음에 두 번의 동맥류 (*설명: 동맥류는 동맥에 생긴 주머니로, 혈관의 일부가 늘어나 풍선처럼 보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맥류는 뇌, 심장, 하지 등 우리 몸에 있는 동맥 어디에나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동맥에서 가장 흔하게 발생합니다. 대동맥류 수술의 합병증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은 심근경색증과 사망입니다.) 중 그 첫 번째를 겪게 되었다.


내 어린 시절 모든 꿈들이 비로소 이뤄졌을 즈음, 난 나의 마음과 삶을 거의 잃었다. 한 번도 이 이야기를 공적으로 한 적이 없지만, 지금이 비로소 그 때가 된 것 같다.


2011년 초였다. 나는 조지 R. R. 마틴의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 (A Song of Ice and Fire)]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 새 HBO 드라마 시리즈인 [왕좌의 게임] 시즌1 촬영을 막 마쳤을 때였다. 나는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채로, 대너리스 타르가르옌 (Daenerys Targaryen) 역 - Khaleesi of the Great Grass Sea, Lady of Dragonstone, Breaker of Chains, Mother of Dragons 으로도 알려진 - 을 맡았다. 어린 공주였던 대너리스는 도트락 (Dothraki)의 남성성의 전형인 군 지도자 칼 드로고 (Khal Drogo)와 강제로 결혼하였다. 굉장히 긴 이야기지만 - 무려 8개 시즌의 이야기다 - 그녀가 위상과 힘을 갖추며 성장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녀는 힘과 자기 소유 (self-possession)의 인물로 성장한다. 곧 어린 소녀들은 금발 가발과 처진 예복을 걸치고 대너리스 차림새로 핼러윈 파티에 참석하였다. 대너리스의 인기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왕좌의 게임의 쇼 크리에이터인 데이비드 베니오프와 D. B. 와이즈는 내 캐릭터 (대너리스)가 나폴레옹, 잔다르크, 그리고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혼합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시즌1 촬영을 마친 후 몇 주 뒤 진행된 공식 홍보 캠페인과 시사회의 기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내 캐릭터가 상징했던 어떤 정복하는 힘을 느끼며 그 기쁨을 누릴 법도 한데, 당시 내게는 그런 힘이 거의 없었다. 나는 겁에 질렸다. 갑자기 내게 쏟아진 지대한 관심에 겁을 먹었고, 내가 거의 알지 못했던 이 할리우드 산업에 대해 겁을 먹었고, 왕좌의 게임 제작진들이 내게 기대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데 겁을 먹었다. 나는 매 순간 나 자신이 "노출되었다"고 느껴졌다. 맨 처음 에피소드에서 나는 벗은 채로 나왔다. 그리고 첫 기자 시사회 이후로 나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궁금증을 품었다: "너는 그렇게 강한 여성을 연기한다면서 왜 옷을 벗지? 도대체 왜?" 이에 대해 내 머릿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남성들을 더 죽여야 내가 증명될까?"라는 답변이 나왔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나는 트레이너와 함께 운동을 했다. 나는 드라마를 찍는 배우이니,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드라마 배우들이 하는 것을 해야 했다. 우리는 열심히 운동했다. 그러던 어느 날, 2011년 2월 11일 아침,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할 때 나는 북쪽 런던 크라우치 앤드 (Crouch End)에 있는 한 헬스장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나는 운동화를 거의 신지도 못할 정도로 피곤한 상태였다. 운동을 시작했을 때, 나는 첫 워밍업 동작들을 할 때 거의 억지로 해야만 했다.


이후 내 트레이너는 내게 플랭크 동작을 시키기에 이르렀고, 나는 즉각적으로 어떤 고무줄 같은 게 내 뇌를 쥐어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밀려오는 고통을 무시하고 플랭크를 계속하고자 했지만, 나는 할 수 없었다. 나는 트레이너에게 잠깐 쉬어야겠다고 말했다. 이후 거의 기어가는 자세로 겨우 라커룸에 도달하였고, 화장실 변기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극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그 고통은 - 마치 총을 쏘는 듯한, 칼로 찌르는 듯한, 뇌를 수축시키는 - 더 심해졌다. 어느 시점에서 나는 내 뇌가 손상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동안 나는 그 고통과 메스꺼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마비되지 않을 거야." 나는 내 손가락과 발가락을 움직임으로써 그게 사실임을 인지했다. 또한 내 기억을 계속 살리기 위해서 왕좌의 게임의 대사들을 몇 개 상기하기도 했다.


나는 화장실 옆 칸에서 내게 괜찮냐고 묻는 한 여성의 음성을 들었다. 아니, 나는 괜찮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도와주기 위해 왔고 조심조심 내 쪽으로 와서 도움을 주려고 했다. 그 후 모든 게 시끌벅적하고 희미해졌다. 나는 응급차의 사이렌 소리를 기억할 수 있고, 새로운 음성들을 들었고, 또 어떤 사람이 내 맥박이 약하다고 말한 것을 기억할 수 있다. 나는 담즙을 토하고 있었다. 누군가 내 휴대폰을 찾았고 옥스퍼드셔주 (Oxfordshire)에 살고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해서 휘팅턴 병원 응급실에서 나를 만나라고 했다.


무의식의 안개가 내게 감쌌다. 응급차에서 나는 바퀴 달린 들것에 실려 나와 소독약 냄새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의 소음으로 가득 찬 복도를 지났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내가 왜 아픈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내 고통을 완화시킬 수 있는 어떤 약도 주지 못했다.


마침내 나는 뇌 스캔을 할 수 있는 MRI 촬영실로 옮겨졌다. 진단은 빠르고 불길했다: 생명을 위협하는 지주막하 출혈 (Subarachnoid hemorrhage; SAH) - 뇌 표면의 동맥이 손상되면서 발생하는 질환이며, 지주막하 출혈로 인한 혈액은 뇌와 두개골 사이의 공간으로 흘러갑니다. - 이라고 했다. 나는 동맥류, 즉 동맥 파열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주막하 출혈 환자의 3분의 1이 즉시 혹은 곧 죽는다고 한다. 살아남는 환자들의 경우, 더 치명적일 수 있는 2차 출혈을 막기 위해 동맥류를 봉인하기 위한 긴급 치료가 필요하다고 한다. 살아남기 위해, 나는 긴급 수술을 진행해야만 했다. 심지어 생명 보장도 해줄 수 없는 수술을 말이다.


나는 런던 중심부에 있는 신경외과 전문 국립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밤 시간대였다. 어머니는 내 병실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아 주무셨고, 나는 약물에 취해, 총에 맞는 듯한 고통에, 그리고 지속적인 악몽에 시달리며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나는 수술을 하기 위해 입원 수속 동의서에 서명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뇌 수술이라니?' 그때 당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기에 있었다 - 나는 뇌 수술을 할 시간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안정을 취한 뒤 서명을 했다. 곧 나는 무의식 상태가 되었다. 그다음 3시간 동안 의사들은 내 뇌를 복구하는 데 노력했다. 이건 내 인생의 마지막 수술이 아닐 수 있고, 내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가 아닐 수 있다. 다만, 그때 당시 나는 24세에 불과했다.




나는 옥스퍼드에서 자랐고, 건강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면서 자랐다. 나는 거의 대부분 "연기 (acting)"에 대해서만 생각하며 살았다. 나의 아버지는 사운드 디자이너 (sound designer)였다. 그는 영국 웨스트엔드 연극 (West End theatre) 에서 "West Side Story"나 "Chicago"와 같은 작품의 제작에 참여했다. 나의 어머니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글로벌 경영 컨설팅의 마케팅 부사장이었다. 우리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나와 내 오빠가 사립학교를 다닐 정도는 되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해 주시려고 했던 부모님은, 사립학교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셨다.


나는 정확히 언제 처음으로 배우 (actor)가 되기로 결심하였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내가 아마도 3-4살 때쯤부터 배우가 되겠다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함께 극장에 갈 때면, 나는 그 백스테이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도취되고는 했다: 온갖 가십거리들, 연극 소품들, 복장들, 그리고 거의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긴급하게 귓속말로 전달되는 것들의 왁자지껄함까지. 내가 3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Show Boat"의 제작 현장에 나를 데려갔다. 나는 보통 굉장히 시끄럽고 가만히 앉아있지를 못하는 타입이었으나, 2시간 이상 그 연극을 볼 때에는 관중석에서 매우 조용하게, 완전히 연극에 몰입된 채로 앉아있었다. 마침내 연극의 커튼이 내려왔을 때, 나는 내 자리에서 일어나 내 머리 위로 우렁차게 박수를 쳤다.


나는 완전히 빠져버렸다. 집에서 나는 "My Fair Lady" 비디오를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많이 봤다. 나는 피그말리온 효과 (=무언가에 대한 사람의 믿음, 기대, 예측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경향)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한 리허설과 좋은 감독과 함께라면 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내 아버지가 내가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기뻐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상당수의 배우들을 알고 있었으므로, 으레 배우들은 신경질적이고 고용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옥스퍼드에 있는 내 학교는 목가적이고, 평화롭고, 다정한 분위기였다. 내가 5살이었을 때, 나는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러나 무대에 올라 대사를 전달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나는 대사를 전부 잊어버렸다. 나는 무대 중앙에 그대로 서서 그 무거운 분위기를 감내하고 있었다. 관중석 첫 줄에 앉아 계신 선생님들은 입모양으로 내 대사를 흉내 내며 어떻게든 내게 도움을 주시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대로 아무 두려움도 없이 차분하게 서있기만 했다. 이러한 차분한 마음 상태가 내 커리어의 밑바탕이 되었다. 지금의 나는 수천 대의 카메라가 찰칵 대는 레드카펫 위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서있을 수 있다. 물론, 그 후 이어지는 디너파티에서 6명과 한 조가 된다면, 나는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전자와 후자는 다른 문제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연기 실력이 점점 더 나아졌다. 심지어 나는 내 대사를 전부 기억해 냈다! 그렇지만 나는 연기 천재까지는 아니었다. 내가 10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네일 시몬의 "The Goodbye Girl" 오디션에 나를 데려갔다.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이 역할을 얻기 위해 참가한 모든 여자애들이 "Cats"에 나온 노래를 부르려고 하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노래란, 영국 포크 송인 "Donkey Riding"밖에 없었다. 내 노래를 인내심 있게 듣고 나서 어떤 누군가가 물어봤다. "혹시 좀 더... 현대적인 노래를 부를 수는 없을까요?" 나는 스파이스 걸스의 "Wannabe"를 불렀다. 아버지는 당황스러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그 역할을 얻지 못했고, 그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오디션 평가지에 적혀 있는 너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평가들을 읽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거야."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학교 연극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에 참여했다: "West Side Story"의 Anita, "The Crucible"의 Abigail, "Macbeth"의 마녀들 중 한 명, "Twelfth Night"의 Viola까지.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는 gap year을 가졌고, 그동안 식당의 종업원으로 일하고 아시아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이후 학부에 진학하기 위해 Drama Centre London에서 수업들을 듣기 시작했다. 풋내기 배우로서, 우리들은 "The Cherry Orchard"부터 "The Wire"에 나오는 모든 것을 공부했다. 나는 소위 "청순한 주연 배우" 역할은 맡지 못했다. 그런 역할은 전부 키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의 금발 학생들에게 주어졌다. 나는 유대인 엄마 역할로 "Awake and Sing!"에 캐스팅되었다. 이때 내 브롱스 악센트를 여러분도 꼭 들어봐야 한다!


졸업 후, 나 자신과 약속을 했다: 딱 1년 동안, 성공 가능성이 있는 역할들만 도전해 보자! 나는 펍(pub), 콜센터, 별로 유명하지 않은 박물관에서 일하며 렌트값을 벌었다. 점점 시간은 흘러갔지만 내 결심은 단단했다.




2010년 봄, 런던에서 새로운 HBO 시리즈의 오디션이 개최되고 있다고 연락이 왔다. "왕좌의 게임" 파일럿 편 진행이 잘 안 되어서 다시 캐스팅을 진행하고자 한다고 했고, 특히 대너리스 역에 대해 Re-casting을 진행한다고 했다. 해당 역할은 초자연적인, 미스터리한 금발 여성 역할로도 불리었다. 나는 키도 작고, 다크한 헤어컬러에다가 곱슬머리인 영국인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준비를 하기로 했고, 그 과정에서 두 장면에 매우 이상한 대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나는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오빠가 나를 치려는 장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열 번째 에피소드에서 내가 불 속을 걸어가는데 아무 상처도 없이 살아남는 장면이었다.


그러한 나날들에는 나 자신이 참 건강하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약간의 저혈압과 낮은 심장 박동 수 때문에 이따금씩 어지러움을 호소할 때가 있었다. 아주 가끔씩 어지러움을 호소하다가 기절할 때도 있었다. 내가 14살이었을 때, 편두통 때문에 침대에서 이틀간 누워있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연기학교를 다닐 때에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쓰러지고는 했었다. 그런데 이를 특별히 "질병"으로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충분히 감내할 만했었고, 또한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일반적인 스트레스이며, 배우로서 느끼는 스트레스의 일부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내가 경험했던 것은 모두 지금 겪는 질병의 예고편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뉴욕 소호 (Soho)에 있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왕좌의 게임"을 읽었다. 4일 후, 나는 한 전화를 받았다. 명백히 말해서, 오디션은 재앙까지는 아니었다. 나는 3주 내로 LA로 오라는 말을 들었고, 추가로 왕좌의 게임 크리에이터인 베니오프와 와이즈, 그리고 그 네트워크 임원진들에 대해 공부해 오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준비를 위해 열심히 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를 비즈니스 클래스에 태웠다. 나는 라운지에서 모든 공짜 티백을 쓸어 담았다. 오디션에서 나는 다른 - 키 크고, 금발의, 몸매 좋은, 아름다운 - 배우가 지나가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 못 본 척했다. 나는 제작자와 스튜디오 임원진들이 관중으로 있는 어두컴컴한 오디션장에서 두 장면 (scene)을 연기했다. 연기를 마쳤을 때, 나는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 "제가 다른 걸 해봐도 괜찮을까요?"


데이비드 베니오프는 말했다: "춤을 춰 볼래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막춤이라도 추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모든 걸 망칠 수 있었다. 나는 베스트 댄서가 아니었다.


내가 오디션장을 나가려고 할 때, 그들은 말했다: "축하합니다, 공주님!" 나는 그 배역을 마침내 얻어냈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나는 호텔로 돌아가 나를 초대해 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루프탑으로 향했다. "나는 괜찮은 것 같아!"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대신에,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혼자 오레오 쿠키를 먹었고, "프렌즈" 시리즈를 보았으며,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에게 연락했다.




첫 번째 수술은 "최소한으로 침범하는 (minimally invasive)" 수술이었다. 즉, 의사들이 내 두개골까지 오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혈관 내 고리 (endovascular coiling)" 수술 기법을 활용해서 내 사타구니 대퇴동맥 중 하나에 와이어 줄을 하나 침투시켰고, 그 와이어 줄은 북쪽을 향해 나아가며, 심장을 지나, 뇌에 다다랐을 때 내 동맥류를 봉인하였다.


수술은 3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내가 깨어났을 때, 고통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컸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내 시야는 제한적이었다. 내 목구멍에는 튜브가 연결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나는 무지 목이 마르고 메스꺼움을 느꼈다. 나는 중환자실에서 4일 뒤 일반 병실로 이동되었고, 2주가 고비라는 말을 들었다. 그 기간 동안 별 탈 없이 지낸다면, 내 질병은 높은 확률로 호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밤, 간호사는 내게 물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내 풀 네임은 Emilia Isobel Euphemia Rose Clarke 이다. 그런데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에, 말도 안 되는 단어들이 입에서 튀어나왔고, 나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공포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듯한 공포였다. 나는 앞으로의 삶이 어떨지 뻔히 보였고, 그건 가치 있는 삶이 아니었다. 나는 배우였다. 그렇기에 대사를 암기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난 지금 내 이름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나는 실어증에 걸렸다. 뇌를 다친 뒤의 트라우마 증상이었다. 내가 아무리 헛소리를 해도 어머니는 그것을 기꺼이 무시해 주셨고, 내가 완벽하게 또렷한 의식 상태임을 확신시켜 주고자 노력하셨다. 그러나 나는 내가 더듬거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최악의 순간들에서, 나는 생명 유지 장치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나는 의료진에게 제발 날 죽여 달라고 말했다. 내 직업 - 내 인생이 어떨 것인지에 대한 내 모든 꿈 - 은 언어, 커뮤니케이션에 달려 있었다. 그것이 상실되었다면, 난 내 삶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중환자실로 돌려보내졌고, 일주일 뒤에 실어증에서 회복되었다. 나는 말할 수 있었고, 내 풀 네임을 말할 수 있었다. 여전히 내 주변 환자들 중에서는 중환자실을 못 벗어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을 생각하면 난 내가 얼마나 행운인지 상기할 수 있었다. 한 달 뒤, 나는 퇴원 승인을 받고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왕좌의 게임" 세트장으로 다시 복귀하였다.




나는 내 삶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퇴원할 때 의료진은 내게 다른 쪽 뇌에 좀 더 작은 형태의 동맥류가 있다고 했고, 언제든 터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렇지만 반대로 해당 동맥류는 그저 무기한적으로 휴면기에 있을 수 있고, 통증을 유발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그렇기에 한번 유심히 지켜보자고 했다. 또한 완전한 회복은 즉각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여전히 감내해야 할 고통이 있었고, 모르핀을 저지해야만 했다. 나는 "왕좌의 게임" 제작진들에게 내 컨디션에 대해 말했지만, 내 상태가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거나, 제작진 내부적으로 이슈가 되는 것을 원치는 않았다. 내 상태와 상관없이 쇼는 계속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내가 두 번째 시즌을 촬영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나는 때때로 토할 것 같은 멍함이 있었고, 너무나도 나약했으며, 내가 곧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매스컴 홍보 투어 중에 런던의 한 호텔에 있었는데, 나는 매스컴 앞에서 매력적으로 보이게끔 더 이상 노력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는 인터뷰 사이사이에 모르핀을 먹지 않으면 두통을 견뎌낼 수 없었다. 고통은 여전했고, 피로감은 내가 겪었던 그 어떤 것보다 강렬했다. 그리고 배우로서 느껴야 할 공허함까지 있었다. 나는 내 직업상 남들 앞에서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너무 많이 신경을 썼다. 만약 충분하지 않았다고 느꼈을 때는, 나는 늘 택시를 탈 때 머리를 크게 박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전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점수를 매기는지에 대해서는 이해도가 거의 없었지만, 어쨌든 첫 번째 시즌에 대한 전 세계의 리액션은 그야말로 판타스틱했다. 내 친구가 "너 IMDb에서 1등이야!"라고 외치며 전화를 했을 때, 내 리액션은, "IMDb가 뭐야?"라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두브로브니크 (유고슬라비아 남부)에서 두 번째 시즌 첫 촬영을 진행할 때, 나는 계속 자기 암시를 했다: "나는 괜찮아, 아직 20대잖아. 나는 괜찮아." 나는 일에 완전히 몰입했다. 그러나 첫 촬영이 끝나고 나는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세트장에서 나는 주저하는 모습은 없었지만, 정말이지 내게 주어진 연기를 소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두 번째 시즌은 아마도 내 최악의 작품일 것이다. 나는 대너리스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매 순간, 매일매일 내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3년도에 나는 왕좌의 게임 세 번째 시즌을 마친 후, 브로드웨이에서 Holly Golightly 역을 맡았다. 리허설은 굉장했지만, 그와 반대로 이 연극이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직감이 있었다. 모든 것은 두 달 정도 지속되었다.


내가 연극 때문에 뉴욕에 있었을 때, SAG (Screen Actors Guild; 미국 배우 노동조합) 건강보험 만료일이 5일 남았을 때, 정기적인 뇌 정밀검사가 있었다. 내 다른 뇌 한쪽에 있던 동맥류가 두 배로 커졌고, 이에 의사는 "앞으로 잘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일전에 진행된 수술보다는 비교적 가벼운 수술을 진행해야 했다. 곧 나는 맨해튼 병원의 개인 병실에서 화려한 환자복을 입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내 부모님도 함께 계셨다. "두 시간 후에 보자." 어머니는 말씀하셨고, 나는 수술실로 향했다. 한번 경험해 본 것이었기에 전혀 문제는 없었다.


이 부분은 제외하고 말이다. 내가 깨어났을 때, 나는 고통스러움에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수술이 실패한 것이다. 나는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고 있었고, 의사들은 지금 다시 수술을 진행하지 않으면 내 생명이 위험할 것이라고 말했다. 재수술을 진행할 때에는 의사들이 과거 수술법을 활용해야만 했다 - 바로 내 두개골을 직접 통한 수술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재수술은 즉시 이뤄져야만 했다.


재수술을 마친 후의 회복은 첫 번째 수술 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나는 대너리스가 경험했던 그 어떤 전쟁보다도 섬뜩한 전쟁을 치른 것만 같았다. 나는 머리에서 어떤 액체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면서 수술실에서 나왔다. 내 뇌를 구성했던 조각들은 티타늄 (금속 조각)으로 대체되었다. 요즘은 내 두피에서 내 귀로 이어지는 상처 커브를 발견할 수 없지만, 처음에 나는 그 상처가 안 보일리가 없다고 생각을 했었다. 무엇보다도, 인지 또는 감각기관 손실에 대한 우려는 사라지지 않았다. 집중력 저하? 기억 상실? 시력 저하? 어떤 손실이 있을지 너무나도 두려웠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농담 삼아 내게 사라진 건 남자를 보는 눈이라고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이런 농담을 할 수도 없을 만큼 심각한 상태였다.


나는 병원에서 다시 한 달을 지내야 했고, 때때로 모든 희망을 잃어버렸다. 나는 사람들의 눈을 잘 마주칠 수 없었다. 극한의 초조함과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자라면서 "이건 불공평하다"는 말을 하지 않도록 교육받았다. 나는 세상 어디에든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교육받으면서 자랐다. 그러나 두 번째 같은 경험을 하게 되면서 모든 희망은 희미해졌다. 나는 내가 그저 하찮은 껍데기 같이 느껴졌다. 그때 당시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이다. 아마도 내 마음이 그때 당시의 기억을 차단해 버리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기억이 난다. 바로 나 자신이 더 이상 살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를 확신했던 것 말이다. 그리고 나의 질병과 관련된 뉴스가 퍼져나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랬고, 수술을 마치고 6주 뒤에 아주 순식간에 National Enquirer라는 매체를 통해서 내 스토리가 짧게 실렸다. 기자는 내게 관련하여 질문을 했었고, 나는 부인했다.


그러나 수년간의 침묵을 지나서, 나는 이제야 풀스토리로 진실을 말한다. 제발 나를 믿어달라: 나는 내가 지극히 평범하고, 전혀 혼자가 아님을 알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가 겪었던 것보다 더 심한 것을 겪었고, 내가 받았던 돌봄은 받지도 못했다.


두 번째 수술을 마친 몇 주 뒤에 나는 다른 출연 배우들과 함께 샌디에이고에 있는 코믹콘 (Comic-Con)에 갔다. 코믹콘에 있는 팬들은 진정 하드코어 팬들이었다; 당신이 그곳에 있었어도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수천 명의 관중들이 있었고, Q&A 세션 직전에 나는 공포스러운 두통을 느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그 구역질 나는 친숙한 공포감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무대 뒤편으로 갔을 때 내 홍보인은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내 증상에 대해 말했지만, 그녀는 곧 MTV와의 인터뷰가 있다고 답했다. 생방송으로 내 죽음이 생중계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그러나 나는 살아남았다. MTV 말고도 더 많은 것을 생존한 채로 견뎌냈다. 두 번째 수술 이후로 나는 심적으로 거의 100% 회복되었다. 배우로 일하는 것 외에도, 나는 "Same You"라는 자선단체를 만들어서 뇌 관련 질병이나 후유증으로부터 회복하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데 힘쓰게 되었다. 나는 내게 도움을 준 모든 사람들 - 가족과 의료진, 친구들에게 -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 나는 2016년에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매일매일 그리워한다. 마지막까지 내 손을 꼭 잡아주셨던 아버지께 나는 너무나도 큰 감사함을 느낀다.


행운 이상으로 뭔가 흐뭇하고 기쁜 것이 찾아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나는 지금 이야기의 끝을 볼 수 있어 행복하고,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그 무엇이 되었든 기대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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