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onement 속죄> 영화의 제목이 너무도 직설적이다. 그리고 강렬하다.
첫 장면부터 그렇다. 속죄하는 당사자인 소녀 브라이오니의 빠른 걸음걸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타이핑 소리..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파열음이 귓가를 거스른다. 큰 저택 내부를 바쁘게 오고 가는 그녀의 움직임 역시 거칠다.. 어린 13세 소녀에게서 풍기는 이미지가 이렇듯 뾰족하다.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에 바짝 긴장이 된다.
이런 긴장감과는 대조적으로 집안의 내부 인테리어는 아주 부드럽고 여성적이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듯 화려한 꽃무늬 프린트 벽지와 커튼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곧 다가올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기 전의 고요함이다. 대형 연못을 포함한 웅대한 정원을 갖춘 영국 저택의 모습도 시선을 끈다.
영화에서 이렇게 스토리 이외의 디테일을 찝어서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영국인 배우 특유의 액센트도 귀를 새롭게 자극해댄다.
브라이오니가 자신의 오빠 리온의 귀가를 환영하기 위해 쓴 첫 번째 연극 대본의 내용은 ‘청춘남녀의 분별 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어린 쌍둥이 사촌 형제들의 비협조로 무산된 공연이었지만..
13세 까칠한 사춘기 소녀 브라이오니의 편협한 시각이 담겨있는 이야기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녀가 세운 어쭙잖은 남녀 간 애정관으로 인해 빚어질 불행한 이야기들이 펼쳐질 것만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일주일 간격을 두고 이 영화를 두 번 보았다.
첫회 시에는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하기에 급급했지만, 두 번째는 좀 달랐다.
영화 관람객의 입장을 넘어서 연출자적 시각으로 디테일한 것들에 자꾸 눈과 귀가 쏠리게 되었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강렬한 ‘대비’였다.
영화의 일반적 내용이나 배경은 생략하기로 하고~
그 ‘대비’ 몇 가지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브라이오니와 세실리아의 집과 하인의 아들 로비의 처소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신분의 격차로 인한 당연한 환경의 차이다. 그러나 이 차이를 뛰어넘는 로비의 특별한 시선이 있었다.
로비는 옥탑방의 욕실에서 목욕을 하면서 천정에 난 창문 넘어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좁은 창틀에서 보이는 비행기의 풍경은 일순간에 불과했다. 이는 다가올 그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이었을까..
브라이오니와 마찬가지로 타자기가 있는 로비의 방, 축음기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와 함께 타자기 자판을 쉬엄쉬엄 눌러대는 로비의 눈빛은 세실리아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있다.
반면 브라이오니는 2층 그녀의 방에서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다. 로비와 세실리아의 수상쩍은 장면을 비장한 눈빛으로!
개천에 풍덩 빠진 자신을 구해주었던 로비는 그녀의 언니 세실리아의 남자 - 그것도 아주 비속한 성관계로 맺어진 - 임이 연거푸 드러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바로 그녀의 눈앞에서!
이 영화는 중요 사건 장면을 먼저 브라이오니의 시선에 담아 보여주고, 뒤이어 그 사건을 되돌려 이야기에 담아 보여주면서 관객들을 이해시키고 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어떤 특별한 장면은 보는 이들을 자극하고 상상시키며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세상은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가 아니다. 그 이면에 있는 배경 이야기가 삭제된 장면은 사실을 왜곡시켜 대상을 파멸로 이끌게 하는 빌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브라이오니는 자기가 상상하는 대로 장면을 이해하고 스스로 그렇게 믿어버릴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까지 자신의 판단을 전이시켰다. 그것이 장면 속 주인공 로비와 세실리아의 인생을 찌르는 비수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전쟁터에서 로비가 겪는 끔찍하고도 처절한 아픔들 - 아이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부상병들이 끝없이 쏟아지고.. 이런 상황에서 군인들을 위로하는 달콤한 초콜릿을 생산하는 대니는 큰 성공을 거둔다. 그에 더해 그가 강간했던 롤라와 결혼까지 하면서 그의 과거 죄악은 깡그리 덮어지고야 만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니가 저질렀던 강간의 죄를 억울하게 뒤집어쓴 로비는 철저하게 희생당하고야 만 것이다.
그의 사랑도, 그의 진심도, 그의 친절도, 그의 인생 모두가!
영화 속 이 글을 쓴 작가 브라이오니는 영화의 말미에 로비와 자신의 언니 세실리아의 재회 장면은 모두 허구라 밝히고 있다. 브라이오니의 거짓 고발로 헤어진 두 사람은 이후 영영 만나지 못한 채, 1940년 6월 로비는 패혈증으로, 같은 해 10월 세실리아는 발햄 지하철역 폭파사건으로 사망했던 것이다.
자신으로 인해 인생 모두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비극의 주인공이 된 세실리아와 로비!
그들을 가상의 이야기에서나마 부활시켜서 행복한 만남을 이어주려는 늙은 브라이오니의 자전적 드라마 <어톤먼트> 그의 고해성사가 사뭇 눈물겹다.
인생은 아이러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연결되어 인생이 아름답게 피어나기도, 비참하게 스러지기도 한다.
어리석은 한 소녀가 품은 오해와 반발심!
그에서 비롯된 거짓증언으로 빚어진 엄청난 죄악의 실상!
그것을 밝히고 속죄하는 이야기 <어톤먼트>
지금도 어디에선가 벌어질법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아닐지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그리고 주변을 돌아본다...
“<Atonement>에 이어 < Mercy> 타이틀을 단 영화를 같은 작가가 만든다면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까?”
안타깝고 아쉬운 <그들의 이야기>가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가에서의 라스트씬과 함께 한동안 머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