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교회의 부흥 - 로마제국 쇠망사 45장 ( 2 )
"결혼이 장려되고 근면이 지배하는 사회는 전염병과 전쟁으로 인한 일시적 파괴에서 곧 회복된다."
롬바르드족의 무력에 제압되고 그리스인들의 전제 제도에 복속된 로마의 운명을 살펴보는 대목에서 눈에 띄는 구절이다. 코로나 2.5단계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꼼짝없이 집에 갇혀 책을 읽던 중 반가우면서도 착잡한 심경이 된다. 과연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희망을 가져봄직한가?...
6~7세기 이탈리아의 암울한 정세에서 외쳤던 구호가 현재의 상황 가운데 여전한 울림을 주고 있다니.. 참 묘한 기분이다.
이때 주목할 점은 그레고리우스 1세가 마우리키우스 치세 시 교황이 됨으로써 ( 590~604 약 14년 재임) 기독교가 나라의 중심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음에 나타나는 그레고리우스 1세의 이력과 처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출생 배경부터가 남달랐다. 신앙심, 학식, 인품, 재산 등에서 빼어난 축복을 받고 태어나 자란 이탈리아 최고 귀족 가문이었다.
그는 유리한 출생 신분과 능력으로 빠르게 로마의 수도 총독 자리에 올랐고, 이 자리에서 그는 현세의 허영과 허식을 포기하는 고귀한 가치를 즐겼다. 그의 엄청난 세습 재산은 로마에 하나, 시칠리아에 여섯 개 해서 모두 일곱 개의 수도원을 세우는 데 헌납되었다.
그레고리우스의 소망은 현세가 아닌 내세에 영광을 얻는 것이었다. 이런 그의 빛나는 인품은 그를 교회에서 몹시 소중하고 유용한 인물로 만들었다. 그레고리우스 1세의 교황 재위 기간은 교회 역사상 가장 교훈적 시기 중 하나였다. 단순함과 교활함, 오만과 겸양, 상식과 미신이 기묘하게 뒤섞인 그의 덕성과 결함까지도 모두 그의 지위와 시대의 풍조에 맞아떨어졌다.
그는 기회만 있으면 설교 강단에 올라가 서투르지만 격렬한 언변으로 같은 기질을 가진 청중의 정열에 불을 지폈다. 유대인 예언자들의 말이 자유로이 해석되고 적용되었다. 현세의 고통에 짓눌려 있는 국민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희망과 불안을 돌렸다. 그는 생애 마지막 날까지 세 시간이나 계속되는 미사를 주재했다.
그레고리우스 성가는 극장 성악과 기악을 망라하는 것이었다. 야만족들은 이 로마 음악을 거친 목소리로 모방하고자 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어릴 때부터 얻은 경험으로 장엄하고 화려한 의식은 평민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고 신앙을 강화시키며 폭력성을 완화하고 어두운 광신을 물리치는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의 아리우스파는 그리스도교회로 귀의했으며, 브리타니아 정복은 카이사르보다 그레고리우스 1세의 이름에 더 큰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여섯 개 군단 대신 마흔 명의 수사가 이 먼 나라를 향해 떠났고, 교황은 엄격한 직무 때문에 이 영적 전쟁에 참여하지 못함을 탄식했다.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켄트의 왕과 앵글로색슨족 신하 1만 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이들 로마 선교사들은 원시 교회의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힘 외에는 어떤 무장도 하지 않았다고 알렸다. 그레고리우스는 사람들이 성령이나 기적, 부활 등의 증거로 종교상의 진리를 확인하도록 했다.
로마 교회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훨씬 더 멀리 떨어진 속주에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의 서한에는 동기가 의심스러운, 오로지 소송을 위한 소송을 자제할 것, 도량형을 그대로 유지할 것, 이유가 있는 연체는 모두 허용할 것, 자의적 부담금으로 혼인의 권리를 구매한 교회 농지 노예의 인두세는 경감해 줄 것 등 건전한 지시 사항으로 꽉 차 있었다.
재물을 사용하는 데 있어 그는 교회와 빈민의 충실한 집사 역할을 하였다. 이들에게 금욕과 질서라는 고갈되지 않는 자원을 후하게 제공하여 필요를 충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가 작성한 수입과 지출의 방대한 기록은 그리스도교 경제의 모범으로 300년 이상이나 라테라노 궁전에 보관되어 있었다.
4대 축일에 그는 로마의 모든 성직자, 하인, 수도원, 교회, 구빈원, 병원에 분기별 수당을 나눠 주었다. 매달 첫째 날에는 계절에 따라 빈민들에게 곡물과 포도주, 치즈, 채소, 기름, 생선, 신선한 식료품, 옷, 현금을 나누어 주었다. 교황은 동정을 받을 만한 대상에게 자기 식탁에서 음식을 덜어 보내고 나서야 검소한 식사를 했다. 시대의 곤궁으로 귀족과 귀부인들도 부끄러움 없이 교회의 자선을 받고 있었다. 300명의 처녀들이 이 은인에게서 먹을 것과 옷을 받았다. 이탈리아의 많은 주교들도 야만족의 지배에서 도망쳐 환대해 주는 바티칸 성으로 왔다. 그레고리우스는 국가의 아버지라 불러도 마땅했다.
그 양심의 감수성은 얼마나 극단적인지, 그는 어느 날 길에서 숨을 거둔 거지 한 명 때문에 며칠 동안 성직을 수행하지 않았다. 로마의 불행 때문에 이 사도들의 목자는 평화와 전쟁의 업무도 관여하게 되었다. 공석이던 군주의 대리 임무를 수행하게 한 것이 과연 신앙심인지, 야심인지 그 자신도 잘 몰랐을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황제를 기나긴 잠에서 깨워 총독과 열등한 대신들의 죄 또는 무능을 드러냈으며, 스폴레토 방어를 위해 고참 병사들이 로마에서 끌려 나가고 있다고 불평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 자신들의 도시와 제단을 보호하라고 촉구하고는 위기가 닥치자 사령관을 임명하고 속주 군대의 작전을 지시하는 일까지 했다.
그러나 교황의 군인적 기질은 인간애와 신앙심으로 인한 주저 때문에 견제되었다. 그는 아무리 이탈리아 전쟁에 사용되는 것이라 해도 공물의 부과는 끔찍하고 억압적인 것이라고 거리낌 없이 비난했다.
한편 황제의 칙령에 대항해 군대를 버리고 수도원 생활을 택한 병사들의 신앙심에서 비롯된 비겁함을 옹호했다. 그 자신의 호언장담을 믿는다면 그레고리우스는 롬바르드족을 쉽게 섬멸할 수 있었다. 그것도 왕이나 대공, 제후를 적의 복수에서 구출해 내는 여지를 전혀 남기지 않는 내분에 의해서 말이다.
그레고리우스는 그리스도교 주교로서 건전한 평화의 직무를 선호했다. 그의 중재는 군대의 소요를 진정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인들의 술책과 롬바르드족의 격정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휴전 협정의 준수를 위하여 자신의 신성한 약속을 쉽게 주지는 않았다.
보편적이고 영속적인 협정의 희망을 잃은 그는 황제나 총독의 동의 없이 나라를 구하려 했다. 적의 칼이 로마 위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교도와 야만족에게서도 존경받고 있던 이 교황의 온화한 웅변과 적절한 선물로 적들은 물러갔다.
그레고리우스의 공훈은 비잔티움 궁정의 비난과 모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민중의 애정 속에서 시민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보상과 군주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권리를 찾았다.
문득 종교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본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다. 교황이라도 신격화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로마제국 쇠망사만 읽어서는 그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그저 그의 성품이나 치적들을 미루어 상상할 뿐이다.
그러나... 당시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등장은 오랫동안 이어진 지도자들의 정치적 무능과 부패, 주변 민족들 간의 패권 다툼, 역병 창궐 등으로 지친 로마제국 및 주변국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었음은 확실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역사, 철학, 인문고전 책들은 단번에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 큰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아 정리해 글쓰기가 참 어렵다. 별거 아닌 내용인데도 하루 온종일 씨름하게 된다.
10년 전 멋도 모르고 연극학과 대학원 과정에 입학해 공부한 적이 있다. 그때 연극의 역사를 살피고 리포트를 작성하는데 무척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준비되지 않은 50대 여인의 무모한 도전이었다. 간신히 수료만 했지 논문을 쓰고 졸업하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그저 단순히 연극무대가 좋고 연기 및 연출작업을 알고 싶어 뛰어들었다가... 이리저리 겉돌기만 하고 빠져나온 것이다.
그래도 그때 이후로 진득하니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글도 쓰게 되었으니 나름 소득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재미로 쓰는 글인데도 자꾸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도 매일 이런 식으로 읽은 내용을 정리해보는 작업은 무척 유익한 일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10여 년 전보다 지금 글쓰기가 더욱 어렵다. 적재적소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고, 읽거나 들은 내용을 너무도 빨리, 자주 까먹는다. 피곤하다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문장 구성하기가 왜 그리 더 어려운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후딱후딱 기발한 생각들을 쏟아내 놓고 물 흐르듯 써 내려가는 젊은이들과 비교하지 않으려 한다.
굼뜨지만... 한 생각 한 문장이라도 머리에 새기고 가슴에 담고 싶은 것을 내어놓으면 되는 거다.
난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역사 속을 걸어왔고, 시한부 개인의 역사를 이룩할 자이니까...
공연히 글이 안 써진다는 핑계로 곁길로 샜다.
읽은 내용 정리하기가 힘들다면.. 그건 온전히 이해하고 파악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렇지만 뭔가 중요해서 건너뛰기가 찝찝하니.. 이럴 때는 그냥 단순히 밑줄 친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으면 되는 거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얼마 전 우연히 '본문 텍스트 촬영해 부쳐 넣기' 기능을 발견하였다. 나 스스로 찾아낸 기능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본문 발췌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세상은 이렇게 점점 발전하고 진화하고 있다. 그에 부응하여 이렇게라도 느릿느릿 쫓아갈 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