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의 회상
오늘은 목요일, 여느 때처럼 아침부터 서둘러 친정인 서울 동부이촌동에 갔다. 매주 목요일은 부모님의 병원 행에 동반하거나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등 친정 부모님을 위한 날로 정해놓고 지키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병원 약속이 없기에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부모님 모시고 집 근처 일식집에서 외식을 하고 장도 봐드려야지.”
이렇게 마음먹고 갔는데 마침 큰오빠 내외가 와서 점심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점심을 차리는 중에 부엌의 가스레인지 불판 중 하나가 잘 작동되지 않았다. 엊그제 수리 센터에 맡겨 고친 후인지라 엄마는 수리를 담당했던 기사를 다시 부르셨다.
친정집 가스오븐은 근 20여 년 전 오빠가 독일에서 구입해 가져온 제품이라 부속품을 구하기 힘들어 수선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며칠 전에 외제품 전문수리기사가 와서 손을 봐주었다는 것이었다. 수리비로 15만 원이라는 거금을 쓰셨다고 하셨다.
잠시 후,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출장기사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집안에 들어섰다.
“아저씨~ 이거 고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말썽이야~”
"아저씨 이거 엉터리로 고친거 아냐? 뭐 이래~"
엄마의 계속되는 볼멘소리에도 여전히 웃으며 가스레인지를 작동해 보던 아저씨가 마침내 말문을 연다.
“이거요~ 허허허~ 스타터 플러그가 달아서 그래요. 교환하셔야 되겠는데요~”
“아니 수리한 지가 며칠밖에 안 지났는데 또 고쳐야 한다니 말도 안 돼!”
“허허허~ 지난번에는 오븐 전체 작동에 문제가 있었던 거고요~ 이번에는 이 불판 하나가 너무 많이 써서 고장 난 거예요~ 허허허~ 부속품을 갈아야겠는데요~”
“부속품 값이 얼마나 되는데요?”
“허허허~ 5만 원은 주셔야겠어요.”
“뭐? 그렇게 비싸? 말도 안 돼!”
“허허허...”
아저씨는 시종일관 환한 미소와 웃음으로 엄마의 계속되는 불만의 언어를 튕겨내지 않고 흡수하고 있었다.
이윽고 짜증 가득하던 엄마의 표정이 아저씨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알았어요~ 조금만 싸게 해서 수리해줘요~”
결국 아저씨는 부속품을 가져다가 수리를 했고 엄마는 4만 5천 원을 지불하셨다.
주변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친정엄마!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오늘의 그 어이없는 사건에 대해 인지하고 계실는지..
아직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사시는 84세 어르신의 고집을 꺾은 그 전자제품 수리공 아저씨!
다름 아닌 그의 무기는 부드러운 언어와 환한 미소, 그리고 유쾌한 웃음소리였다.
< 까다로운 어르신 길들이기 > 2012. 4. 5. 목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의 이야기다.
독서동아리에서 맺어진 귀한 인연의 동생이 얼마 전 이 글을 기억하고는 그때의 감동을 전해주었다.
그래 그때 쓴 글을 확인하고자 아무리 여기저기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온라인 책 읽기 모임에서 동생 Y가 하나의 힌트를 던져주었다.
“언니~ 그때 도서관 글쓰기 수업에서 C선생님이 언니의 글을 예시문으로 함께 읽고 나누었었어요. “
그렇다면 당시 과제를 제출했을 텐데.. 이메일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건의 이메일회신에서 당시 운영되었던 글쓰기 동아리 카페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그곳을 찾아가 비로소 그 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생의 기억에서처럼 그리 훌륭한 글은 아니었지만.. 감개 무량했다.
그렇게 까다로운 어르신이었던 엄마는 물론 더 이상 정기적으로 찾아 뵐 부모님이 이제 한 분도 남아계시지 않다…
반면에 나를 찾아올 자식들에게 아직 내 존재는 ‘돌봄의 대상’이 아닌 ‘의지의 대상’이다.
부드러움도 까다로움도
다아 지나가는 어르신들 사는 이야기.
마냥 부드러울 수도 노상 까다로울 수도 없는 우리들의 모습.
어떻게 길들여지고 있는지 이젠 나 스스로를 돌아볼 때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