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이 아니라 기록하기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면서 자연스럽게 미니멀라이프 커뮤니티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인기글의 몇 가지 공통점을 알게 되었다. 일단 사진이 있으면 좋고, 느낀바가 있으면 더 좋고, 무엇보다도 변화가 드라마틱하면 미라인들은 환호한다. 게다가 스토리까지 있으면 금상첨화! 그게 앞전에 말한 변신의 잔해 같은 건데... 나도 드라마틱하고 싶다. 그런데, 드라마를 만들려다보니 자꾸만 미루게 된다. 왜 그럴까 고민해봤는데... 장르를 잘못 찾아서 그런 것 같다. 코미디? 호러? 자기계발? 어쨌든 내가 생각한 인기 있는 이야기의 공식은 이렇다.
주인공 평화 -> 평화가 깨어짐 -> 주인공 분노 -> 주인공 적대자와 싸움 (혹은 모험) -> 갈등 -> 주인공 승리(혹은 성취) -> 주인공 다시평화
그러니까 드라마가 생기려면 내가 원래 평화로웠는데 그 평화가 깨어지는 사건(냉장고 고장, 이사, 자연재해 등등)이 생겨야 한다. 문제는 그 타이밍을 모른다는 거. 뭐 인위적인 사건을 연출해서 드라마를 만들어? 아니다. 그건 너무 가식적이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하지만 이 프로젝트가 흥미롭지 않다면 내가 유지할 수 있을까?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도전자들에게도 흥미로울만한 미니멀라이프 도전기의 스토리는 어떤 게 좋을까? 한 번 생각해 봤다.
스토리1. 나는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다. 은행예금은 오르지 않고 사람들은 너나없이 주식을 사서 재태크를 한다는데 경제공부는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냉장고는 꽉꽉 채워 엔진이 터질 것 같지만 당장 먹을 것은 하나 없는 빈곤한 상황. 무엇을 할라치면 머리부터 아파와 할 수 없이 낮잠을 잔다. 한 숨 자고 일어났더니 꿈속에서 신령님이 뭐라고 귀뜸 해주신 말이 생각나 필기해 보았다. 다 쓰고 나니 종이에는 ‘우선 정리정돈부터 하거라.’라는 글이 있었고 나는 계시를 받은 듯 집안의 물건을 모두 꺼내서 필요 없는 건 비우고 자리를 잘못 찾은 건 정리하면서 집을 구석구석 반짝반짝하게 쓸고 닦았다. 그러자 머릿속이 아주 단순하고 맑아지면서 놀랍게도 숨겨둔 비상금을 찾았다. 라는 영험한 이야기는 어때? 아아... 신비주의에 의존한 그런 개연성 없는 전개는 별로라고?
스토리2. 어느 날 몸이 천근만근 찌뿌등해서 무슨 운동을 할까 생각하다가 동네 뒷산으로 등산을 갔다. 산을 타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졌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웬 마뿌리 나와 있었다. 마는 몸에 좋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얼른 마를 캐서 집에 돌아온 뒤 마샐러드를 요리해서 먹었다. 그런데 이 마를 먹고 나니 샘솟는 힘에 이끌려 뭐라도 해야 하는데 때마침 엉망진창인 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부터 나는 정리를 멈출 수 없는 병에 걸려 아무리 그만두려 해도 필요 없는 물건을 버리고 비우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마치 빨간구두 아가씨처럼 쉴 새 없이 정리를 했다. 그러다보니 결국 병을 고치는 유일한 방법이 ‘미니멀라이프’였다는 이야기는 어때? 아... 신파도 아니고 희귀병을 갖다 붙이는 건 오바라고.
스토리3. 이건 실화인데 잘 들어봐. 하루 종일 보채던 아이가 겨우 흥미를 붙인 게 있었는데 그건 그림그리기였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다가 빨간펜을 찾아서 찾다보니 집안 구석구석 어디도 안 보였다. 마침 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어서 밖으로 사러 나가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아이는 빨간펜이 없다고 계속해서 울었고 결국 나는 빨간펜 찾기위해.... 집안의 아무도 열지 못하게 했지만 푸른수염의 세 번째 아내가 열었다던 나의 창고방문을 열고 말았다. 그 곳의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한 물건들을 꺼내고 빨간펜이 있을만한 곳을 찾다 보니 결국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는 어때? 좀 땡기는데... 눈보라 치는 날 창고방 정리하고 싶지는 않다고. 하긴 너무 추웠어.
스토리4.
코로나로 인해 부업의 길이 막힌 나는 예술가로서 뭐라도 지원받고 싶었다. 하지만 예술인 등록이 안 되어 있는 상황이었는데 다큐감독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최소 2편 이상의 작품경력이 있어야 했다. <아내의 고양이> 1편 밖에 작품이 없던 나는 1편 더 기획하기로 결심했다. 이름 하여 <정리 진짜 못하는 사람이 찍은 정리 정돈하는 영상> 이다. 이 다큐를 촬영하기 위해서는 전쟁폭격을 받은 듯한 창고방을 샤랄랄라하고 리프레쉬하게 바꾸는 과정이 관건이었는데- 코로나 지원금기간이 끝나기 전에 빨리 예술가인증을 받아 지원금을 타는 게 목표였다. 그래서 결연한 의지로 촬영과 동시에 미니멀라이프 도전기가 막을 올린다는 이야기는? 코로나지원금은 작품활동이 어려운 예술가에게 주는 거지 지원금을 타기위해 작품활동하는 예술가에게 주는 게 아니라고? 으흠...일리 있는 말이네.
“그런데 왜 드라마틱해야 되는데. 그냥 밋밋하면 안 돼?”
“내 삶이 재밌는 이야기였으면 좋겠어.”
“그냥 진솔하면 어떨까.”
“진솔한 삶은 편집 없는 인생 같이 지루한 거 아닐까?”
“그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네가 먼저 판단할 필요는 없어.”
“..... 그러네. 혼자 북 치고 장구 칠 필요는 없지.”
쇼윈도라이프가 아니라 미니멀라이프를 하려는 거면서 나는 어느새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었나보다. 시작도 전에 드라마를 생각하고 미리 기승전결 흐름을 통제하려고 했던 걸 보면. 어느새 내 인생은 각본이 없으면 불안한 긴장으로 가득 차 있던 걸까. 그냥 어깨 힘을 빼고 라이브로 살아갈 자신은 정녕 없었나. 그럴 필요 없는데. 내가 진지하게 임하는 미니멀라이프 도전기가 드라마처럼 누군가에게 꼭 흥미로워야 할 필요는 없는 건데 말이다.
작가지망생으로 살아왔던 세월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건지, 아니면 그냥 관종이 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나는 내가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진 주인공이었으면 좋겠고, 그게 무엇이든 대입해보는 버릇이 있는 것 같다. 그 덕분에 불필요한 기획의 고민도 하는 게 아닐까. 기획은 사실 값비싼 고민이다. 지금 내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의 시작을 어떻게 기획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떤 평범한 이야기(질리도록 들었던 옛날 옛적에의 ‘클리셔’라 해도)라도 어떻게 시작했는지 기록하는 일이다. 매일 어떻게 실천했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거르지 않고 기록하는 일. 그 기록이 모이고 모이면 그 때부터 기록의 쓸모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만약에 어떤 흥미로운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하더라도, 목표했던 미니멀라이프에 다가갔던 경험은 다른 일을 시작할때도 큰 자신감을 줄터이니 손해볼 장사는 아니다. 그러니 기획에 고민하지 말고 실천하고 기록하자.
내 인생에 드라마는 없다. 그러므로 드라마틱한 변화는 드라마에서 보자. 시작이 반이라고 그냥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변화를 찾아보자.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다큐를 찍는 마음으로 관찰해보자. 이건 기획이 아니라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