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구멍 앞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소방관인 그 사람이 가스 선에 라이터를 갖다 대며 집을 폭파시켜 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그런 때가 아니라 결국 언젠가는 늙어 버릴 그가 어느 날 나에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짧은 편지를 써서 내 손에 쥐여 주는 순간이라는 걸."
박지리 작가의 『맨홀』을 펼치며 이 문장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섰습니다. 폭력보다 더 잔인한 것이 사과라니. 가해자의 참회가 피해자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이 거짓말 같은 진실 앞에, 저는 문득 우리가 용서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가려왔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시멘트로도 막을 수 없는 것들
거리를 걷다 가끔 바닥으로 눈을 돌리면 맨홀 뚜껑을 마주치게 됩니다. 아스팔트 위에 질서 정연하게 배치된 원형 또는 직사각형의 금속 덮개들. 우리는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 굳이 생각하지 않고 지나갑니다. 보이지 않으니까 없는 것처럼 여기죠. 하지만 도시가 배출해 내는 많은 오염물과 축축한 그것들이 그 어둠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박지리 작가가 제시하는 '맨홀'이라는 은유는 바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보지 않으려 하는 것, 덮어두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죠.
"십 년간 나를 불러들인 구멍은 구청에서 고용한 사람들이 시멘트로 막아 버렸다. 하지만 여기 밤거리를 달리는 이 구멍은 무엇으로 막아야 할까."
물리적인 구멍은 시멘트로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의 구멍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을 메우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그 구멍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악취로 기억되는
"그날들은 흐르지 않는 물처럼 맨홀 속에 그대로 고여 있었다. 악취가 났다. 그렇지만 이곳에 맨홀이 존재하고 내가 뚜껑을 열고 계속 들어오는 한, 나는 그 고역스런 구정물 속에서 계속 잠수를 해야 했다."
이 문장을 읽으며 저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떠올렸습니다. 마들렌 과자에서 피어오르는 기억의 향기와는 정반대의 상황이죠. 『맨홀』의 주인공에게 기억은 달콤한 향수가 아니라 '악취가 나는' 구정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주인공이 그 어둡고 냄새로 가득한 공간을 계속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곳만이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피하는 수단이며 자신의 진짜 모습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일 겁니다. 지상의 세계에서는 '소방영웅의 아들'이라는 가면을 써야 하지만, 맨홀 속에서만큼은 자신의 어둠을 숨기지 않아도 되니까요.
반복되는 유전자
"나는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분노에 휩싸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와 누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폭언을 퍼붓고 폭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이 부분을 읽으며 가장 섬뜩했던 건 폭력이 대물림되는 방식이었습니다. 주인공은 아버지를 그토록 증오했는데도 결국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누나와 엄마를 대하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죠.
여기서 작가가 제기하는 것은 단순한 환경론이 아닙니다. '폭력적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폭력적이 된다'는 뻔한 인과관계가 아니라,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성'에 대한 근본적 질문입니다. 선량하고 피해를 당한 사람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모호하다는 것이죠.
사과라는 이름의 또 다른 폭력
다시 처음 문장으로 돌아가 봅니다. 왜 주인공은 아버지의 사과를 가장 두려워할까요?
사과는 관계의 복원을 전제로 합니다. 가해자가 사과하고 피해자가 용서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을 제공하죠. 하지만 어떤 상처는 용서해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또 어떤 기억은 사과를 받아도 계속 아물지 않고 덧나기만 할 뿐입니다.
더 잔인한 건 사과가 피해자에게 또 다른 부담을 지운다는 점입니다. 사과를 받으면 이제 용서해야 한다는 압박, 원망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기대, 그리고 무엇보다 가해자를 이해해야 한다는 요구까지. 주인공이 두려워하는 건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사과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과를 해도 한번 저지른 짓이 없던 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니까."
강아지 달이에게 사과하며 깨달은 이 진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과는 과거를 지우지 못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현재를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죠.
무의미한 일상
"운동장은 셀 수도 없이 많은 검은 폐타이어로 둘러싸여 있다.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바퀴는 도통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쓸데없이 제자리에서 돌고만 있다. 하지만 의미 없는 회전을 하고 있는 것이 어디 이 타이어들뿐인가."
이 장면에서 저는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를 떠올렸습니다. 끝없이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우리에게 의미 없어 보이는 일들을 그것이 내가 짊어진 죄인 것인 양 반복하며 살아가죠. 하지만 카뮈가 시지프스의 '반항'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았다면, 박지리는 그 무의미함 자체를 직시하라고 말합니다.
청소년 보호관찰소의 폐타이어들은 한때 길 위를 달렸지만 이제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람에 섞여 불어오는 고무 냄새에는 수백 개의 타이어가 달리면서 내는 바퀴 소리가 희미하게 살아 있다'라고 작가는 말합니다. 죽은 것들도 흔적을 남긴다는 뜻일까요. 의미 없어 보이는 회전도 작은 기억을 남긴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살아간다고 믿는 모든 움직임이 사실은 제자리를 맴도는 것에 불과하다는 뜻일까요.
기억에는 별다른 경계선이 없어서
"기억에는 별다른 경계선이 없어서 발 없는 유령들이 시간의 장벽을 소리도 없이 넘어 다닌다."
이 문장이 특별한 이유는 기억을 '유령'으로 형상화했기 때문입니다. 유령은 죽었지만 죽지 않은 존재, 과거에 속하지만 현재에 나타나는 존재죠. 우리의 기억도 그와 같습니다. 지나간 일이지만 현재를 지배하고, 끝난 관계이지만 지금도 우리를 괴롭히죠.
특히 트라우마가 된 기억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시간의 순서를 무시하고 불쑥 나타나서 우리를 과거로 끌고 가죠. 소설 속 주인공의 의식이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오가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맨홀』에서 가장 불편한 진실은 주인공에게 이름이 없다는 점입니다. 친구들은 모두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는 그냥 '나'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서술 기법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적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이 '나'가 될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어둠을 품고 살아갑니다. 대부분은 그 어둠을 잘 통제하며 살아가지만, 어떤 순간, 어떤 조건에서 그 어둠이 터져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죠. 주인공도 원래는 선량한 아이였어요. 하지만 견딜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결국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이 소설이 주는 가장 큰 공포라 생각합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 우리 모두 잠재적으로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허허벌판에 선 우리들
"땅바닥에 여행 가방을 내려 둔 채 표지판도, 사람도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서서 발이 묶인 것처럼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 장면이 가슴 아픈 이유는 그 아이가 결국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갈 곳이 없는 고아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우리의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가족이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귀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사회적 위치를 이루었지만 정작 마음 둘 곳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주인공은 소방영웅의 아들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껍데기일 뿐, 진짜 자신은 여전히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아이나 다름없죠.
구멍과 함께 살아가는 법
결국 『맨홀』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메울 수 없는 삶의 구멍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주인공도 끝까지 자신의 구멍을 메우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패배를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그 구멍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시작일 수 있거든요.
우리는 모두 완전하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각자의 어둠을 품고 있고,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죠. 그 불완전함을 숨기려 하기보다는 인정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어요.
작가가 남긴 마지막 질문
박지리 작가는 서른두 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너무 일찍 떠난 천재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었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맨홀』을 읽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그 무거움이 곧 깨달음이기도 하죠.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했던 진실들과 마주하게 되고 우리 안의 어둠을 직시하게 되니까요. 어쩌면 그것이 문학의 역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안한 위로를 주는 게 아니라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것, 우리가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보게 만드는 것이요.
박지리 작가가 우리에게 남긴 『맨홀』이라는 구멍은 아직도 열려 있습니다. 그 구멍을 들여다보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진실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들과 마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조금 더 진정한 자신에게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구멍 앞에 우리는 여전히 서 있습니다.
그 구멍을 메우려 하지도 도망치려 하지도 않고 그저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며 말이죠.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용기일지 모릅니다.
완전해지려 애쓰지 않고 상처를 숨기려 하지 않으며
우리 안의 어둠까지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맨홀 뚜껑을 조심스레 열어
그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진실 하나를
가슴에 품고 지상으로 올라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삶의 방식일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