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그 끝에서 무엇을 발견하는가
출발하기 전날이었다. 밤이 아직 오지 않았을 때였다.
클로디 윈징게르의 『내 식탁 위의 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출발도 도착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밤이 오지 않았으므로 낮도 완전히 끝나지 않은 그 애매한 경계의 시간. 이 첫 문장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예언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떠나기 직전의 시간 속에 살고 있으며, 동시에 아직 완전히 도착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이야말로 가장 위태롭고, 가장 본질적인 삶의 순간이라는 것을.
1965년, 서른 살도 되기 전에 클로디 윈징게르와 그녀의 남편은 알자스 지방 보주산맥의 '부아바니'로 들어간다. '추방당한 숲'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곳에서 그들은 60년을 살았다. 히피 문화가 꽃피던 시대. 많은 이들이 대안적 삶을 꿈꾸었지만 대부분은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 하지만 윈징게르는 남았다. 양을 기르고, 지의류로 염료를 만들고, 풀의 이미지를 프린트하며 예술 작품을 만들고, 70세가 되어서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83세에 ‘소피’라는 주인공으로 분한 자신의 이야기를 이 소설에 담아 페미나상을 받았다.
이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 편의 긴 고백이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쳐 숲 속에 숨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곳까지 따라와 무너지고 있다는 고백. 대안을 찾아 떠났지만 그 대안마저 해마다 조금씩 죽어가고 있다는 고백. 그리고 이제 여든이 넘어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었을 때, 자신이 평생 꿈꿨던 '다른 삶'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는 고백.
어느 가을 저녁, 목줄이 끊어진 개 한 마리가 나타난다. 생식기가 처참하게 찢겨 있는, 학대당한 흔적이 역력한 개. 소피는 그 개에게 '예스'라는 이름을 붙인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지막 문장, "그렇다, 나는 예스라고 말했다. 나는 동의할 것이다"에서 가져온 이름. 그토록 참혹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여전히 생의 긍정을 온몸에 두른 개에게, 윈징게르는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긍정의 언어를 선물한다.
"예스의 혀, 커다란 장밋빛 혀에 들려줄 말이 있다." 그 혀는 예스의 언어이기도 한데, 프랑스어에서 '언어'와 '혀'는 같은 단어 '랑그(langue)'다. 입안의 혀가 수시로 핥고 미끄러지고 움직여서 붙잡는 것이 불가능하듯, 언어 역시 그렇다. 예스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혀를 사용해 윈징게르에게 말을 건다. "내 혀로 너를 명명하노라."
우리는 언제나 인간이 동물에게 이름을 붙인다고 생각한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모든 생명체에 이름을 부여했던 것처럼. 하지만 작가는 그 관계를 뒤집는다. 예스가 소피를 명명한다. 예스가 윈징게르를 명명한다. 예스의 혀가, 예스의 언어가 인간에게 새로운 이름을,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개를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예스와 함께 사는 존재'로.
"예스의 도취한 모습에 나도 기분이 들떴고, 안전이 일상화된 세계에 내 쪽에서 질서와 안전을 더하려고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 문장이 포착하는 것은 노년의 본질적인 두려움이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더 조심스러워진다. 넘어질까 봐, 다칠까 봐, 실수할까 봐. 세상은 점점 더 위험해 보이고, 우리 자신은 점점 더 연약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안전을 더하고 또 더하려 한다.
하지만 예스는 다르다. 그토록 끔찍한 학대를 당했음에도 예스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돌진한다. 냄새를 쫓고, 소리에 반응하고, 흥분하고, 기뻐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윈징게르는 깨닫는다. "세상에 즐거움을 한 스푼 더한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일렁였다. 건방짐을 더하자. 오류도. 괴상함도. 별남도. 미친 짓도."
우리는 언제부터 안전만을 추구하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실수하지 않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믿게 되었을까. 예스는 그런 우리에게 묻는다. 삶이란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소진하는 것 아니냐고. 오류와 괴상함과 미친 짓을 통해 우리는 진짜로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예스가 흥분하는 대부분의 냄새를 윈징게르는 포착할 수 없다. "우리 인간과 나머지 종들이 공포의 시대에 들어섰음을 너무나 잘 아는 나는 내 방식대로, 즉 걱정 섞인 처참하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냄새를 맡았다." 솔잎 냄새는 이미 사라졌다. 가뭄으로 소나무들이 서서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눈 냄새도 이젠 거의 맡을 수 없다. 스라소니 냄새는 완전히 사라졌다.
같은 숲을 걷지만 예스와 윈징게르가 경험하는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예스는 여전히 존재하는 냄새들을 찾아내며 기뻐하고, 윈징게르는 이미 사라진 냄새들을 기억하며 슬퍼한다. 예스는 현재를 살고, 윈징게르는 과거와 비교한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다. 우리는 기억하는 능력 때문에, 비교하는 능력 때문에 현재를 있는 그대로 경험할 수 없다.
"녀석은 태어날 때부터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예스에 대한 이 짧은 문장은 사실 모든 동물에 대한, 그리고 동물이었던 우리 인간에 대한 문장이기도 하다. 우리도 한때는 그랬다. 태어날 때부터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앞섰고, 안전보다 모험이 중요했다. 하지만 우리는 점점 더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집 안으로, 관습 안으로, 예측 가능한 일상 안으로.
윈징게르는 적외선을 투과하는 시각을, 초음파를 듣는 청각을, 애벌레의 털끝처럼 민감한 촉각을 갖기를 열망했다. 다른 종들이 경험하는 세계를 경험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은 연필이었다."
결국 글쓰기란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감각을,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상상하고 기록하는 것. 연필만으로 꿀벌의 시각과 박쥐의 청각을 불러내는 것. 언어라는 빈곤한 도구로 언어 너머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
그리고 윈징게르는 묻는다. "나는 여전히 글쓰기를 믿는가?" 세상이 이토록 빠르게 무너지는데, 소나무가 서서 죽어가고 스라소니가 사라지는데, 글을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신이 혼미해지는 상황 속에 스스로를 내버려 두어선 안 돼. 귀를 열고 눈을 뜨고 계속해서 글을 써 나가. 세상의 대혼란에 대해 이야기해."
이것은 절망 속에서의 윤리적 결단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언하겠다는 결단. "목재 공장으로 변한 숲에 대해 써. 허브 공장으로 변한 초원에 대해 써. 토지의 고갈에 대해, 그것의 황폐화에 대해 목소리를 내."
윈징게르가 예스를 통해 배우는 것은 결국 이것이다. "인간이 우리 종(種) 안에 격리된 존재, 즉 다른 종들과 분리된 존재가 아님을. 우리는 그들과 다르긴 하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가 인간에 속한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지극히 제한된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그보다 훨씬 광대한 존재다."
인간이라는 정체성은 하나의 제약이다. 우리는 인간으로 살면서 인간의 감각으로만 세계를 경험하고, 인간의 언어로만 생각하고, 인간의 관점으로만 판단한다. 하지만 예스는 윈징게르에게 인간 너머의 세계를 보여준다.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 냄새들, 우리가 들을 수 없는 소리들, 우리가 느낄 수 없는 떨림들로 가득 찬 세계. 그 세계 속에서 우리는 "훨씬 광대한 존재"가 된다.
"나는 겨울에도 푸르른 금작화 가지들과도 일체가 되었는데, 그 꽃에서는 현실의 삶과도 같은 매운 향이 났다. 삶은 맵다. 삶의 진짜 맛이 있다면 매운맛이다." 우리는 대개 삶을 달콤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설탕을 더하고, 고통을 덜어내고, 모든 것을 부드럽게 순화시키려 한다. 하지만 윈징게르는 말한다. 삶의 진짜 맛은 매운맛이라고. "삶의 잔혹성이 가져다주는 탁월한 매운맛."
이따금 삶은 쓴맛이 나기도 한다. 그것은 "매운 맛보다 한 층 훌륭한, 단맛 없는 쓴맛"이다. 우리는 쓴맛을 피하려 하지만, 어쩌면 그 쓴맛이야말로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정직한 선물인지도 모른다.
윈징게르는 예스와 함께 걷는 것이 소설 쓰기와 같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간에 기계 부품들에서 시작해 바이크를 조립하고, 그것에 열광적으로 집착하고, 달아나기도 하고, 질주하면서 자유를 느낀다. 금지된 길로 들어갈 수도 있다."
소설 쓰기는 조립하는 일이다. 흩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관찰의 조각들을, 언어의 부품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라는 기계를 만드는 일. 그리고 그것을 타고 어디론가 달아나는 일. 현실에서는 갈 수 없는 곳으로, 금지된 길로.
하지만 세대 간의 균열은 점점 커지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그 균열은 계속 커지고 있다. 사람들은 모든 존재가 진동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 모두 진동한다는 사실에만 주목한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각자가 서로 다른 주파수로 진동하고 있어서 서로를 알아듣지 못한다.
"우리 아이들은 누구에게 서재를 물려주게 될까? 자녀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면 말이야. 안나 카레니나는 과연 어떻게 될까?" 이것은 한 노작가의 두려움이다.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것들이 다음 세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은 번개오색나비나 큰황제나방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걸 기억하고 그리워할 수 있겠는가? 방울새, 소리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걸 기억하고 지키기 위해 싸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만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본 것만 그리워할 수 있다. 그래서 생물종의 멸종은 단순히 그 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종을 사랑할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미래 세대는 그들이 잃어버린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갈 것이다.
"들어오렴, 동물들아, 우리 같이 식탁에 앉자. 너희를 위해 자리를 마련했어." 『내 식탁 위의 개』라는 제목의 의미는 이런 초대다. 우리의 식탁에, 우리의 삶에, 우리의 세계에 다른 종들을 위한 자리를 만드는 것. "짐승들에게 열려 있는 식탁 같은 제목. 아이들이 멀리서 큰 소리로 외칠 것 같은 제목." 이것은 "하나의 징후"이자 "하나의 선언"이다.
윈징게르는 깨닫는다. "우리가 글을 쓰는 건 타인이나 후손을 위해, 죽음에 대항하기 위해서나 영원에 다다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몸짓의 아름다움이나 우리가 겪은 상실을 말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단지 언어에 불법점거 당했으므로 글을 쓴다."
언어에 불법점거 당했다는 이 표현이 얼마나 정확한가. 우리는 언어의 주인이 아니다. 언어가 우리를 점거하고, 우리를 통해 말한다. "나는 우리가 개집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개에게 속한 개집. 그 개는 내가 아니고, 내 안에서 멈추지 않고 말하는 것. '로고스'라 불리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나를 통해 말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나는 그저 통로일 뿐이다. 로고스의 개집일 뿐이다.
그리고 어느 날 예스가 사라진다. "그 후로 내 심장이 있던 자리에 구멍이 뚫렸다. 내 몸은 더 이상 아무것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끝없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하지만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이따금 나는 식탁에 앉아 예스의 이름을 속삭인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도 나는 끄떡없이 글을 쓴다."
눈물이 맺힌 채로도 끄떡없이 글을 쓴다. 이것이 윈징게르가 발견한,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이다. 상실 속에서도, 슬픔 속에서도, 세상이 최악으로 치닫는 와중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증언하는 것. 사라진 것들의 이름을 속삭이는 것. 그리고 글을 쓰는 것.
이 책을 읽으며 계속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왜 도망치는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가. 그리고 어디로 도망치는가.
윈징게르는 도시를 떠나 숲으로 도망쳤다. 예스는 학대하는 주인으로부터 도망쳤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견딜 수 없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친다. 하지만 도망친 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는가.
윈징게르가 발견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연결이었다. 인간 사회로부터 도망쳐 숲으로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인간 너머의 존재들과 더 깊이 연결되었다. 예스를 통해, 진드기를 통해, 개똥지빠귀를 통해, 백단풍나무를 통해, 노루를 통해. "각각의 진드기가 나에게 ‘나예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새벽을 채우는 개똥지빠귀 울음소리가 말하는 ‘나예요 ‘."
모든 존재가 '나예요'라고 말하는 세계. 그것은 자아가 확장되는 세계이자, 동시에 자아가 해체되는 세계다. 나는 더 이상 나만이 아니다. 나는 진드기이고 새이고 나무이고 노루다. "어떤 나예요는 다른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들도 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낙원에 살지 않는다."
우리는 낙원에 살지 않는다. 이것은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전제다. 윈징게르는 낙원을 꿈꾸지 않는다. 그녀는 숲이 목재 공장이 되고, 초원이 허브 공장이 되고, 소나무가 서서 죽어가는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세계에서, 바로 그 잔혹함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예스'라고 말한다. 삶에 동의한다.
그녀는 자연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숲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진드기와 학대와 죽음으로 가득하다. 그녀는 노년을 미화하지 않는다. 늙음은 자유롭지만 동시에 고통스럽고 외롭고 두렵다. 그녀는 대안적 삶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도시를 떠났지만 세상의 파멸은 여전히 그녀를 따라왔다.
하지만 바로 그 정직함 때문에, 그 환멸 없는 냉철함 때문에, 그녀가 마지막에 내리는 결론은 더욱 강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다. 눈물이 맺힌 채로도 끄떡없이.
목줄이 끊어진 개처럼,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도망치는 중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디로 도망치느냐가 아니라, 도망친 그곳에서 무엇을 발견하느냐다. 윈징게르는 숲에서 예스를 발견했다. 그리고 예스를 통해 더 광대한 세계를, 인간이라는 제한된 정체성 너머의 세계를 발견했다.
우리가 도망치는 이유는 결국 자유를 찾기 위해서다. 하지만 진짜 자유는 어떤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 속에 있다.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 언어와 맺는 관계, 삶 자체와 맺는 관계 속에. 예스의 혀가 윈징게르를 명명했듯이, 우리도 우리를 명명해 줄 타자를 필요로 한다. 우리에게 '나예요'라고 말해 줄 존재를.
밤이 아직 오지 않은 때, 출발하기 전, 우리는 언제나 그 경계의 시간에 서 있다. 완전히 떠나지도, 완전히 머물지도 못한 채.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삶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영원한 경계, 영원한 이행. 그리고 그 불안정한 균형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예스'라고 말할 수 있다. 삶에, 타자에, 언어에,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금작화 향기처럼 매운, 용담 속 뿌리처럼 쓴,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진짜인 삶에.
- 덧붙이며.
아마도 올해의 마지막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번 글은 평소보다 많이 나아갔습니다.
한 해를 정리할만한 시점이기도 하고요.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통해 주고받은 따스함과 그간의 행적을 되짚으며
무엇을 알게 되었고 놓쳤으며
앞으로의 밑줄과 글쓰기는 어떠해야 할지
스스로 조금은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구나 싶습니다.
시대와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작가님들의 그것만큼 치열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책이 일상을 한 뼘쯤 다르게 만드리라는 믿음.
그 믿음으로
읽고 긋고 고민하고 나누어
작게나마 공명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놀랍도록 빠르게 변해가는 한 해였습니다.
며칠 남지 않은 새해에도 마찬가지이겠지요.
모쪼록 아득한 무언가를 좇기보다
흐름에 굴하지 않고 나의 호흡으로 가져와 유영할 수 있길 바랍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