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 선더 러브
어디서부터 꿈인지 헷갈려하며 맹희는 깨어났다. 속이 쓰렸고 왼쪽 무릎에 멍이 들어 있었다. 시원한 물을 유리컵 가득 따라 꿀꺽꿀꺽 다 마셨다. 속을 보이면 어째서 가난함과 평안함이 함께 올까.
우리는 언제부터 평범함을 검열당하는 사회에 살게 되었을까. 누군가 스물일곱의 삶을 인터넷에 올리면 돌아오는 건 평가다. 충분히 노력했는지, 올바른 선택을 했는지, 자격이 있는지.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중 「롤링 선더 러브」는 그 심사위원석 앞에 선 한 여성의 이야기다. 아니, 정확히는 심사위원석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의심하기 시작한 사람의 이야기다.
일반인 데이트 예능 [솔로농장]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소설의 주인공 조맹희. 로드숍에서 산 사천오백 원짜리 립밤을 쓰는 그가, 골프장 경치를 자랑하는 남자 앞에서 문득 생각한다. "보답받지 못하는 마음을 세상에 얼마나 더 줘야 할까. 이것은 투자와 수익의 문제일까." 삼 년 전 가까운 이들에게 비연애, 비혼을 '선언'했던 절친 리아와 함께 그것이 '표명'이나 '서약'과 무엇이 다른지 두 시간 넘게 논의한 끝에 결론을 내지 않았다. 결론을 내야 할 필요가 없었겠지.
김기태 작가는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불과 2년 만에 젊은작가상과 이상문학상 우수상을 연거푸 받으며 한국문학계의 가장 뜨거운 신인으로 떠오른다. 그의 소설들이 화제가 된 이유는 단순하다. 연애 리얼리티에 출연하려고 신청서를 넣는 사람, 인터넷 쇼핑몰에서 낮은 가격 순으로 물건을 검색하는 사람, 펭수 이모티콘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그의 소설 안에서 비로소 응원받기 때문이다. 소설가 임솔아의 말처럼, 김기태는 '응원의 태도를 발명'하고 있다.
「롤링 선더 러브」는 김기태 소설의 핵심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소설이 다루는 건 '평범함'의 정체인데 더 정확히는, 우리가 평범하다고 부르는 삶이 누구의 기준으로 설정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맹희는 "결석하지 않고 학교도 잘 다녔다. 법을 어긴 적도 없었다. 하루에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을 일터에서 성실히 보냈고 공과금도 기한 내에 냈다." 그럼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의 댓글들은 그런 삶을 '빡대가리'라고 조롱한다. 솥뚜껑삼겹살도 즉석떡볶이도 먹지 말고 맥주도 마시지 말고 섹스도 하지 말고 닥치고 공부해서 시험에 붙든 돈을 모으든 했어야 한다고.
우리는 여기서 멈춰야 한다. 과연 무엇이 평범한 것인가. 누가 평범의 기준을 정하는가. 맹희가 품은 질문은 단순하지만 날카롭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 이 질문 앞에 '평범함'이라는 단어는 부서진다. 평범함이란 누군가의 삶을 재단하는 칼날이 된다. 당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당신의 선택이 어리석었다고, 당신은 자격이 없다고 선언하는 심판대가 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혼자 됨'에 대해 질문한다. "혼자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둘이서 행복할 수는 없다"는 전언에 맹희도 동의한다. 하지만 "혼자가 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침대로 돌아가듯, 중력에 끌리듯 혼자됨이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이미 혼자인데 어떻게 더 혼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떤 혼자는 다른 혼자보다 더 완성된 것일까."
비연애와 비혼을 '선언'해야 하는 사회. 혼자됨을 '실천'해야 하는 시대. 마치 혼자 있는 것조차 어떤 성취나 완성의 형태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처럼. 평범하게 사는 것조차도 누군가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것처럼. 맹희의 혼란은 이 지점에서 온다.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지만, "왜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부재를 느낄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롤링 선더 러브」에서 인상적인 장면중 하나는, [솔로농장]에 참가 중인 맹희가 데이트권을 건 게임에서 거름을 퍼 담는 순간이다.
거름에 삽을 찔러 넣었다. 한 삽 한 삽 거름을 수레로 퍼 담다 보니 활력이 돋았다. 수북하게 차오르는 거름과 함께 마음도 괜히 충만해졌다. 왜 재밌지. 육체노동의 기쁨 뭐 그런 건가. 대단치 않은 말과 행동을 간 보고 따지고 해석하고, 나 또한 읽히길 기대하면서도 감추고 꾸미고 짐짓 모르는 체하고...... 수레에 거름을 채워 밭에 뿌리듯 그저 열성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그렇게 이룰 수 있다면 쉬울 텐데.
우리는 왜 이토록 복잡한 관계의 미로 속에서 살아가는가. 왜 우리의 감정과 선택은 끊임없이 해석되고 평가받아야 하는가. 거름을 삽으로 퍼 담는 단순한 노동처럼, 그저 존재하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작가는 여기서 '보편'이라는 개념을 전복시킨다. 보편적인 삶이란 누군가가 설정해 놓은 기준이 아니라, 거름을 삽으로 뜨는 그 순간의 충만함처럼, 각자의 삶에서 발견되는 고유한 리듬이어야 하지 않을까.
"바보 같지만 가끔 되풀이하고 싶은 모든 소란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 김기태가 던지는 이 질문 앞에서,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정의'와 '명명'의 폭력성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과 외모를 초월한 사랑이 더 진실하다 여기면서도, 정말 그것들을 초월하려고 시도하면 자격을 묻는다. 이 모순 앞에서 맹희는 "공포와 동경을 저울질하다 길을 잃은 기분"을 느낀다.
맹희가 내다보는 미래는 화려하지 않다. 황혼 알바를 기웃거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기 위해 까짓것 하면 하는 거였다." 그리고 "비 오는 날 리아와 부침개를 구우며 알밤막걸리를 걸친다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인생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멈춰 서야 한다. 이것이 과연 '평범한' 삶인가. 누가 결정하는가. 누가 감히 맹희의 알밤막걸리보다 누군가의 골프장 경치가 더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김기태는 여기서 '평범함'을 재배치한다. 평범함은 누군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상태가 아니라, 각자가 선택하고 구성하는 삶의 형태다.
"속을 보이면 어째서 가난함과 평안함이 함께 올까." 우리는 속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가난해 보일까 봐. 자격이 없어 보일까 봐. 하지만 속을 보이는 순간, 가난함과 함께 평안함도 온다.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솔로농장]을 마치고 돌아온 맹희는 "사랑하고 왔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은총처럼 빛나는 저녁이 많아졌다. 하지만 맹희는 그 무해하게 아름다운 세상 앞에서 때때로 무례하게 다정해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무례하게 다정해지고 싶은 충동. 이것이야말로 김기태가 발명한 '응원의 태도'가 아닐까. 세상이 정해놓은 예의범절을 벗어나, 거칠지만 진실된 방식으로 서로를 끌어안는 것.
맹희는 예감한다. "앞으로도 맹신과 망신 사이에서 여러 번 길을 잃을 것"임을. "많은 노래에 기대며. 많은 노래에 속으며." 록이 죽었다고들 하지만, "록은 안 죽었어. 죽은 건 세상 아닐까." 그리고는 "모순적인 기억들을 뭉쳐 눈밭에 굴"린다.
과거를 미화하지 않는다. 현재를 쉽게 비난하지도 않는다. 다만 모순적인 것들을 뭉쳐 눈밭에 굴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 자체가 삶이고, 그것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바로 작가가 응원하는 '평범한 자들'이다.
「롤링 선더 러브」는 연애 예능이라는 통속적인 소재를 통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사는가. 평범함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답은 명확하다. 평범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건 각자의 삶뿐이다. 로드숍의 립밤을 집어드는 삶도, 거름을 삽으로 뜨는 삶도, 모두 동등한 무게를 지닌 삶이다.
비 오는 날 부침개를 부치며 알밤막걸리를 마시는 삶. 거름을 삽으로 뜨는 노동에 괜히 마음이 충만해지는 삶. 이것들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인생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만족할 만한 인생인가. 누가 그것을 결정하는가.
우리는 모두 조맹희다. 길을 잃고, 다시 찾고, 또 잃는다.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려 애쓰다가, 문득 묻는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고. 그리고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평범함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각자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거름을 삽으로 뜨듯, 충만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