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인터내셔널(2) - 김기태

보편 교양

by 세잇
속이 텅 빈 스토리텔링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잠든 학생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모든 인간에게 주체성이란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묻는 일은
얼마나 고독한가.


김기태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중 「보편 교양」은 2020년대 한국 교육 현장의 서늘한 민낯을 응시한다. 과거의 교육이 대입이라는 관문을 위해 있는 꿈도 주머니에 쑤셔 넣게 만들었다면, 지금의 입시는 '자기주도성'과 '전공적합성'이라는 평가 기준에 맞춰 없는 꿈도 있는 듯 꾸며내야 하는 기만적인 서사 쌓기가 되었다. 꿈을 갖는 일보다 꿈을 말하는 일이 더 중요해진 시대다. 그러다 보니 교양은 사람을 넓히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설득 가능한 이야기로 포장하는 기술처럼 변한다.


주인공 곽은 인문학적 소양을 가르치려는 교사지만, 그가 마주하는 교실은 차갑다. 한쪽에는 입시용 포트폴리오를 위해 눈을 빛내며 질문을 던지는 소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지적 호기심은커녕 생에 대한 호기심조차 잃은 듯 깊은 잠에 빠진 다수가 있다. 곽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활기찬 음악을 틀어보기도 한다. 유머러스한 사례와 시각 자료도 준비한다. 하지만 수면 앞에서는 그런 꼼수도 두어 번이 한계다. 곽은 아무리 훌륭한 스탠드업 코미디언도 자는 관객을 웃길 수는 없다는 비유를 떠올린다. 잠든 학생들 앞에서 교사는 코미디언이 되지만, 자는 관객은 웃지 않는다. 그러다 곽은 생각한다. 인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영위하려는 ‘꿈과 끼’가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다는 믿음은 혹시 미신이 아닐까.




곽이 지치는 순간은 ‘가르치지 못해서’가 아니라, ‘가르쳐야만 하는 제도’가 학생의 삶을 얼마나 무심하게 소외시키는지 깨닫는 순간이다. 수업 시간에 잠만 자는 학생들을 깨우다 지친 어느 날, 곽은 한 학생으로부터 “늦게까지 배달을 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듣는다. 아이는 사과한다. 그러나 사과해야 할 것은 아이가 아니라 이 사회이지 않나. 그 순간 곽이 느낀 공포는 교육이 삶의 맥락을 얼마나 쉽게 삭제해 버리는가에 대한 자각에서 온다.


밤마다 도로 위로 내몰리는 열여덟 살에게 마르크스의 사상이 무슨 소용일까. 그들에게는 오십 분의 인문학 수업보다 오십 분의 숙면이 훨씬 더 귀하고 절실한 생존의 조건이다. 곽은 엎드려 자는 학생들에게서 멜빌의 소설 속 주인공 바틀비를 읽어낸다.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되기를 거부했던 바틀비처럼, 아이들은 온몸으로, 즉 ‘잠’으로써 억압적인 제도 교육에 저항하고 있는 셈이다. 잠은 불성실이 아니라, 이들이 가진 가장 조용한 언어다.


곽은 또 다른 질문을 품는다. 왜 마르크스만 문제가 되나. 마르크스를 읽고 사회주의자가 되는 게 공자를 읽고 유교 원리주의자가 되는 것보다 위험한가. 따지자면 카뮈의 『이방인』이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학생이 자기 어머니의 기일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대낮의 태양에 눈이 부셔서 아랍인을 총으로 쏠지도 모르니까. 이 유머는 검열의 허술함을 폭로한다. 위험한 것은 책이 아니라, 책을 읽은 인간을 한 가지 결과로 예단하려는 확신이다.


학교에서 잘 배워야 훌륭한 시민이 된다는 믿음은, 사실 제도교육의 수혜로 ‘모범적인 성취’를 얻어 삶의 기반을 마련한 어른들의 고정관념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학교 밖에서 어떤 삶을 살아내는지 모르는 채, 교실 안의 태도만으로 그들의 미래를 예단하는 순간 교육은 계몽이 아니라 폭력이 된다. 이 작품이 겨누는 것은 학생의 무기력이 아니라, 학생을 향한 예단의 언어다. “아무도 예단할 권리는 없었다”는 작가의 문장은 그래서 더 단호하게 들린다. 학교 수업을 듣지 않는 것이 부와 권력만을 추종하는 괴물이 된다는 뜻도, 비판 의식 없는 죄수가 된다는 뜻도 아니다.


물론 입시지옥이란 입시에 목매는 경우에만 지옥이다. 다수는 여전히 잠을 자거나 게임을 하고, 아예 학교에 오지 않는 학생들도 많다. 그러나 곽은 그들을 방치하지 않는다. 그는 ‘포기’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응원한다. 모두가 각자의 스무 살을 향해 나름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고 여기며 마음속으로 응원한다. 어쩌면 보편 교양이란 바로 이런 감각일지도 모른다. 모두를 같은 속도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서로를 예단하지 않는 태도. 평균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최소한의 겸손.




곽은 상자 속에 있던 피낭시에, 혹은 다쿠아즈나 비스코티일 수도 있는, 유럽 어느 언어로 된 이름이 분명한 디저트를 하나 입에 넣었다. 역시 달콤했다. 경박한 단맛이 아니라 깊이가 있고 구조가 있는, 하지만 묘사해보려고 하면 이미 여운만 남기고 사라져서 어쩐지 조금 외로워지는 달콤함. 사람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달콤함.


이 ‘달콤함’은 자본주의와 제도가 우리를 길들이는 방식에 대한 비유다. 거친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련된 취향과 적당한 안락함, 그리고 ‘보편’이라는 이름의 매끄러운 가치를 통해 우리를 서서히 설득한다. 그 달콤함은 디저트의 단맛이 아니라 제도가 우리를 붙잡는 말맛이다.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이미 졌다는 사실을 늦게 알아차린다. 그래서 저항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다만 그 달콤함에 취해 내가 왜 이 체제에 순응하고 있는지, 왜 밤새 배달을 해야 하는지 묻는 감각을 잃어버릴 뿐이다.


졸업식 날, 일 년 내내 잠만 잤던 세 학생이 곽에게 다가와 사진을 찍자고 청한다. 곽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들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며 응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준 선생님에게 ‘대박’이라며 환호한다. 곽은 주춤거린다. 왼쪽 가장자리 혹은 오른쪽 가장자리. 손으로는 브이, 하트, 엄지 또는 주먹. 빨간 머리가 “선생님 고장 났다” 하면서 웃는다. 곽은 그들이 성인의 삶을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만, 불투명한 상황이라면 실례일 수 있으므로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이 장면은 교육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거창한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존재를 지우지 않고 그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가 잠든 시간의 사연을 함부로 묻지 않으면서도, 그가 어딘가에서 나름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음을 믿어주는 것. 삶의 진짜 교양이란 타인의 삶을 예단하지 않는 겸손함에 있다.




우리가 정말로 경계해야 할 것은 마르크스의 위험한 사상이 아니라, “나처럼 살아야 올바른 삶”이라고 믿는 어른들의, 혹은 기득권의 오만한 확신이다. 그 확신을 거두고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비로소 ‘보편’이라는 말 아래 숨은 폭력에서 벗어나 각자의 유일무이한 삶을 시작할 수 있다.


가르치려 들지 않을 때 비로소 배움이 시작된다는 역설을, 잠든 아이들의 정수리 위에서 배운다. 그리고 그 뒤로는,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어질 때마다 먼저 그 정수리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속도로 흐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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