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고 높은
「무겁고 높은」은 카지노가 들어선 폐탄광촌, 즉 '영광'이 떠난 자리에 고여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곳에서 삶의 지표는 단순하고도 잔인하다. 똑똑하면 카지노 직원이 되고, 용감하면 손님이 된다. 하지만 그 외의 평범하고 어설픈 다수는 무엇이든 팔아 치우며 살아간다. 송희는 술에 취해 뒤꿈치가 꺾인 싸구려 신발을 대충 벗어던져놓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읽는다. "왜 이 모양이야"라는 탄식은 비단 신발만이 아니라, 고여버린 개천 같은 삶 전체를 향한 비명이다.
이 무력한 일상에 송희가 선택한 도피처이자 해방구는 역도다. 하지만 송희가 역도를 대하는 태도는 우리가 아는 스포츠의 그것과 다르다. 그녀는 바벨을 들어 올리는 영광보다, 그것을 제 힘으로 '버리는' 순간을 갈망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역도에 내려놓는 동작은 존재하지 않았다. 들었다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에 그대로 바닥에 버렸다.
송희는 들어보고 싶다기보다 버려보고 싶었다.
가난, 부모, 지긋지긋한 동네 같은 우리 삶의 무게들은 대개 우리가 선택해서 '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다 보니 우리 어깨 위에 '놓인' 것들이거나, 발등에 '떨어진' 것들이다. 내가 들지 않은 것은 내 마음대로 버릴 수도 없다. 그저 그 무게에 짓눌려 질질 끌려갈 뿐이다. 송희는 깨닫는다. 내 삶을 짓누르는 이 비루함을 진정으로 '버리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그것을 내 온 힘을 다해 완벽하게 '들어 올려야' 한다는 것을. 버리는 것과 떨어뜨리는 것의 차이는 바로 그 주체성에 있다.
송희의 고독은 현실의 무게가 결코 바벨처럼 친절한 손잡이를 갖고 있지 않다는 데서 온다. 역도장에서 수십 킬로그램을 거뜬히 들던 송희가 술 취한 아버지를 옮기며 쩔쩔매는 장면은 서글픈 상징이다. 현실의 고통은 규격화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진창처럼 흐물거리고, 뒤꿈치가 꺾인 신발처럼 어설프며, 녹슨 차 문처럼 예기치 않게 무릎을 긁어놓는다. "자기가 역도를 하며 수십 킬로그램을 어렵지 않게 들어 올릴 수 있는 건, 오직 바벨이 바벨의 모양이기 때문임을" 깨닫는 순간, 역도는 영광의 사다리가 아니라 현실을 견디기 위한 구체적인 근력 훈련으로 변모한다.
대회에서 100킬로그램을 들지 못했을 때, 송희는 승패라는 세간의 언어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산수를 시작한다. 94킬로그램만큼 이기고 100킬로그램만큼 졌다는 계산. 이것은 결과로만 삶을 예단하려는 세상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다. 비록 정해진 목표(100kg)에는 닿지 못했을지라도, 94kg을 버텨낸 근육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송희는 결국 역도를 그만둔다. 하지만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완성에 가깝다. 기록이 늘지 않아도 매일 훈련에 임하고, 자신에게 목도리를 선물하고, 아버지를 더 효율적으로 옮기는 자세를 알아가는 일상. 그 과정에서 송희는 이미 제 삶의 무게를 충분히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역도는 더 이상 "미래도 아니고 꿈도 희망도" 아니게 되었다. 그저 삶이라는 진창을 디디기 위해 필요한 단정한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소설의 끝, 눈 내리는 겨울 오후에 송희는 역도장을 걸어 나온다. 모텔 간판과 녹슨 탄차가 뒤섞인 비루한 풍경이 하얀 눈에 공평하게 덮이는 순간, 그녀는 비로소 '영광'이라는 무거운 이름표를 떼어낸다.
눈 내리는 겨울 오후의 고요. 산등성이의 헐벗은 자리. 교정의 새파란 인조 잔디. 철교와 고가도로. 박물관 앞에 전시된 녹슨 탄차. 모텔과 마사지숍의 현란한 입간판. 주인 없는 자동차들. 모두가 공평하고도 아늑하게 하얀 눈에 덮여서, 미처 닿지 않는 그늘에서도 단정한 마음으로 목도리를 여밀 수 있었던 날. 왼발 오른발을 눈밭에 디디며 빙판과 진창의 시간을 예비하던 긴 겨울의 한가운데.
그날이 송희가 정말로 역도를 그만둔 날이었다.
송희는 이제 안다. 우리도 이제 안다. 역도대 밖의 세상은 여전히 빙판과 진창일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그녀의 몸 안에는 94킬로그램을 들어본 사람만이 가진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고 있다. 무언가를 버리기 위해 기어이 들어 올려 본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는 무엇을 버리기 위해 이토록 무거운 오늘을 들고 있는가. 김기태 작가는 송희를 통해 말한다. 무겁고 높은 곳에 있는 가공의 영광을 쫓는 대신, 내 어깨에 놓인 비정형의 고통을 온전한 내 힘으로 감당해 내는 것, 그리하여 그것을 미련 없이 '내던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 그것이 가장 고독하면서도 위대한 평범함의 성취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