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의 모든 것(2) - 백수린

빛이 다가올 때

by 세잇

미확정의 시간, 우리를 통과하는 빛의 농도

타인의 생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오만은 때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한다. 하지만 우리가 타인의 고통이나 욕망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고 믿는 순간조차 사실 우리는 철저히 '나'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세상을 보고 있을 뿐이다. 백수린의 단편 「빛이 다가올 때」는 자매처럼 가까웠던 '나'와 '인주 언니'의 관계를 통해 타인이라는 심연을 마주하는 일의 불가능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비추는 빛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이 소설은 여덟 살 차이 나는 인주 언니와의 기억을 복기하며 시작한다. 세탁소집 딸인 '나'에게 인주 언니는 선망의 대상이자 동시에 답답한 순응의 상징이었다. 언니는 "첫째는 부모 뜻을 거슬러 살기가 힘들다"며 어머니의 못다 이룬 꿈인 교수가 되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산다. '나'는 그런 언니를 보며 반항심을 키우고, 부모님이 해석하지 못하는 외국어와 문법을 배우며 묘한 우월감과 슬픔이 섞인 감정으로 그 좁은 세탁소를 벗어나려 한다.



안락함과 비좁음 사이, 성장의 비린내

유년 시절의 세탁소 풍경은 안온하다. 눅진한 스팀다리미의 열기, 펄럭이는 일력, 비닐 싸개의 부스럭거림. 그곳에서 '나'는 숙제를 하고 부모는 노동을 한다. 그러나 지식의 부피가 커질수록 안락했던 공간은 비좁은 감옥이 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그것을 매우 비좁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엄마 아빠가 해석할 줄 모르는 한시를 내가 읽고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잘 지네고 있냐?'라고 쓰는 아빠나 포스트잇에 '시게 약 살 것'이라고 적는 엄마는 내게 설명해 줄 수 없는 to 부정사와 동명사의 차이를 내가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예민하게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묘한 슬픔이 뒤섞인 우월감을 느끼며.


부모의 문법과 나의 문법이 달라지는 지점에서 성장은 시작된다. 내가 배우는 'to 부정사'를 아빠는 평생 알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는 부모를 한 명의 인간으로 객관화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성장의 증거인 동시에, 다시는 이전의 순수한 결합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절망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타인의 어둠을 대하는 우리의 방식

인주 언니는 어머니의 사고에 대한 부채감을 안고 평생을 대리인으로 살았다. 자신의 꿈이 아닌 어머니의 꿈을 박사 학위라는 성취로 갚으려 했던 언니의 삶은 타인의 기대를 내면화한 자의 비극이다. '나'는 언니를 이해한다고 믿었다. 눈먼 큰 이모와 함께 센트럴파크에 서서 눈을 감고 햇살을 느꼈을 때, '나'는 큰 이모가 느끼는 세상을 똑같이 공유했다고 착각한다.


그날, 우리는 가만히 눈을 감고 눈 덮인 센트럴파크에 오래 서 있었다. 큰 이모가 느꼈을 방식대로 세상을 느껴보기 위해서. 나는 피부에 닿는 공기의 차가운 감촉과 겨울나무의 냄새와, 눈을 감은 채 얼굴을 빛 쪽으로 들어 올리면 눈꺼풀 위로 느껴지는 햇살의 온기를 그때만큼 그렇게 생생하게 느낀 적이 없다. 그때 나는 우리가 바로 그 순간 큰 이모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고 믿었다. 언니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고.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타인이 느꼈던 방식 그대로 세상을 느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얼마나 헛된가. 우리는 오직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대로만 느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에 공감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내 피부에 닿는 차가운 공기와 내 눈꺼풀을 간지럽히는 햇살의 온도를 나의 방식으로 해석한 것일 뿐이다. 인주 언니가 겪었을 죄책감의 무게나, 뒤늦게 찾아온 낯선 욕망의 달콤함과 고통을 '나'는 결코 언니의 것으로 느낄 수 없다.



미확정의 시간, 핑크빛과 오렌지빛의 경계

소설 속 해변의 풍경은 이 모호한 관계의 속성을 시각화한다. 낮도 밤도 아닌 시간, 육지와 바다의 경계가 지워지는 찰나. 사방이 핑크빛으로 가득하고 그 사이 오렌지빛이 깃든 그 미확정의 시간은 우리가 타인을 마주하는 시간과 닮아 있다.


작가는 말한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우리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때 알아채지 못하며, 타인이 통과하는 그 치열한 시기를 뒤늦게야 짐작할 뿐이라고. '나'는 뒤늦게야 깨닫는다. 언니에게도 자신만의 욕망이 꿈틀대던 시기가 있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타인의 눈에는 방황이나 일탈로 보일지라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마땅한 '언니의 삶'이었음을.



빛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

우리는 흔히 타인을 '안다'라고 말하며 그들의 삶에 함부로 빛을 비추려 한다. 하지만 진정한 빛은 타인을 구석구석 파헤치는 탐조등이 아니라, 서로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해 질 녘의 노을 같은 것이어야 한다.


내가 타인이 될 수는 없지만 타인이 느끼는 세상의 결을 조금이라도 짐작해 보려 눈을 감는 행위 그 자체가 사랑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비록 그 시도가 헛수고로 끝날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 사이의 거리가 아주 조금은 좁혀졌을 것이라 믿고 싶어진다.


당신의 주변에도 '인주 언니'처럼 누군가의 기대를 사느라 자신의 빛을 죽여온 이가 있는가. 혹은 당신이 타인의 삶을 다 안다고 자만하며 함부로 연민의 손길을 내밀지는 않았는가.


우리는 각자의 세탁소에서, 각자의 문법으로 세상을 배운다. 서로의 문장을 완벽히 번역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상대의 문장에 깃든 슬픔의 농도를 가만히 지켜봐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백수린이 말하는, 어둠이 오기 전 우리에게 다가오는 '아주 환한 빛'의 정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