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과 개
부모의 사랑은 흔히 완성되거나 혹은 결함 없는 상태로 주고 싶어 한다. 자식이 상처 하나 없이 매끄러운 길만 걷길 바라고, 자신이 그런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완벽한 보호자이길 소망한다. 하지만 백수린의 소설 「흰 눈과 개」에서는 마치 설원 위에서 길을 잃은듯한 한 아버지의 시선을 통해 그 사랑이 결코 깨끗한 눈밭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를 구르고 다친 이들이 서로의 절뚝거림을 알아보는 일임을 나지막이 고백한다.
거리를 두어야만 보이는 것들
소설은 "딸은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걷고 있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스위스의 이국적인 풍광 속에서도 부녀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이들의 심리적인 단절을 상징하는 듯하다. 과거, 고단한 삶의 터전이었던 천변의 왁자한 풍경과 ‘돌아갈 집’이 있다는 안도감은 아버지에게 사라진 지 오래다. 아버지는 딸의 눈에서 자신과 닮은 그림자를 발견한다. "언제 어디서든 자기가 있는 곳을 자기 자리로 느끼지 못하는 이"의 고독.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만큼은 그 고독을 모르길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그 고독은 아버지가 딸에게 물려준 가장 깊은 유산이 된다.
부녀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자꾸만 오역된다. 뱅쇼와 함께 주문한, 핫도그를 불어로 직역한 ‘쉬앵쇼(뜨거운 개)’라는 단어를 두고 나누는 대화는 이들의 관계를 관통하는 블랙코미디가 된다. 아버지는 딸이 상처받지 않길 원해 개를 키우지 못하게 했지만, 딸은 상처를 직접 겪어보고 스스로 배우길 원했다. 아버지는 보호라는 미명 아래 딸의 경험을 통제하려 했고 그것은 딸을 통해 ‘위선’이라는 날카로운 화살로 돌아왔다.
마음의 구멍,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
배신감과 분노가 빠져나간 자리에 생겨난 "깊이를 알 수 없는 버려진 동굴" 같은 마음의 구멍은 우리가 타인과 맺는 관계의 본질적인 허기를 보여준다. 아버지는 딸에게 사과하고 싶어 스위스까지 날아왔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겉돌기만 한다. 그는 전나무 숲을 홀로 걸으며 딸이 말한 대로 자신이 정말 ‘위선자’ 일지도 모른다는 수치심에 직면한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은 종종 이기적인 욕망과 섞인다. 자식이 고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뒤에는, 자식의 고통을 지켜보는 자신의 괴로움을 피하고 싶은 회피가 숨어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 수치심이야말로 사랑이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지점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 내 사랑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타인의 고통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세 개의 다리로 증명하는 생명력
소설의 끝자락, 아버지는 휴게소에서 세 개의 다리로 폴짝폴짝 뛰어오르는 개 한 마리를 발견한다. 이 개는 소설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다. 아버지는 사위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와, 그 곁을 지키며 함께 식은땀을 흘리는 딸의 시간을 전해 듣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아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막막했을 딸의 밤들.
그때 마주한 세 다리 강아지의 천진함은 아버지에게 커다란 깨달음을 준다. 생명은 결핍이 없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결핍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뛰어오르는" 힘 때문에 경이롭다는 사실을. 딸이 아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처 입은 단 서방을 선택한 이유는, 그녀가 이미 그 '세 다리 강아지' 같은 생의 의지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상처받지 않은 이들의 특권이 아니다
고독으로 진저리가 쳐질 것 같은 이 세상에, 딸에게 누군가가 있다니. 결혼이란 형태든 아니든, 상대가 누구고, 어떤 인종이든 어떤가.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딸에게 그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산 사람만이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랑을 주는 법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 사람뿐일지도 모른다고.
사랑이란 게 완벽한 두 사람이 만나 낙원을 건설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은 각자의 마음속에 뚫린 어두운 동굴을 서로에게 보여주는 용기이며 내 다리가 하나 모자라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상대의 어깨를 짚는 일이다.
아버지는 딸에게 사죄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말이 다시 위선처럼 들릴지라도, 그 사과 안에 담긴 진심의 농도가 딸에게 닿기를 바란다. 흰 눈으로 뒤덮인 세상은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는 망각의 공간이 아니라 그 위에 새겨진 서툰 발자국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고백의 장이 된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 다리가 모자란 채로 생의 설원을 걷고 있다. 하지만 괜찮다. 세 개의 다리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사랑의 방향으로 뛰어오를 수 있으니까. 그 서툰 도약이야말로 백수린의 소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 즉 '가장 낮은 곳에서 비치는 환한 빛'의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