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의 모든 것(4) - 백수린

눈이 내리네

by 세잇

미완의 계절

삶의 어떤 구간은 오직 기다림으로만 채워진다. 스무 살 무렵의 우리는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은 근거 없는 자부심과 정작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열등감 사이를 위태롭게 오간다. 백수린의 소설 「눈이 내리네」는 모과나무집이라는 이모할머니네의 정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이제 막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려는 다혜와 생의 저물녘에 선 임복례 할머니의 시간을 나란히 놓아둔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며, 그 기다림의 끝에서 마주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찬란한 허영과 성장

이십 대 초반의 다혜에게 타인의 시선은 자아를 지탱하는 가장 큰 축이 된다. 그녀는 도서관보다 모과나무집 거실에서 과제하는 것을 즐기는데, 이는 자신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할머니의 시선 속에서 '칭찬받고 싶은 마음,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픈 허영심'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누구나 그런 시절을 통과한다. 내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세계로 나를 데려다 줄 진짜 사랑을 꿈꾸고, 나의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치환해 줄 운명적인 사건을 기다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혜가 그 집에서 목격한 것은 찬란한 미래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늙는 일'이었다. 몸의 통제권을 잃고 수치를 망각하는 노년의 삶. 다혜는 그것을 놀라운 특권이라 정의하지만 그것은 사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밖에 없는 소멸의 전조이기도 하다. 청춘의 허영이 타인의 눈에 비친 나를 가꾸는 일이라면, 노년은 그 비친 상마저 희미해지는 과정인 셈이다.



사랑의 유예

다혜의 연애는 소설 속에서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이미 끝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별을 유예하는 다혜의 심리는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이다. 그녀가 붙잡고 있었던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그를 통해 투영되던 '가장 젊고 예뻤던 시절의 자신'이었다.


끝에 대한 두려움. 사랑을 다시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 다혜는 아는데, 당시 이별을 계속 유예했던 건 무엇보다 젊고 예뻤던 시절의 자신을 그가 상기시켰지 때문이었다.


우리는 때로 사랑이 끝났음을 알면서도 그 잔해 속을 구른다. 이별을 인정하는 순간, 그 사람과 함께했던 나의 가장 빛나던 한 조각도 영원히 사라질 것 같은 공포 때문이겠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게 될 때까지, 아름다웠던 기억조차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오욕으로 변할 때까지 관계를 끌고 가는 것은 어쩌면 성장을 위해 치러야 하는 가장 가혹한 통행료일지도 모른다.



오디의 단맛

이모할머니가 들려주는 '오디 이야기'는 이 소설의 가장 아름다운 변곡점이다. 열 살의 어린 할머니가 무작정 집을 나서 연초록빛 흙길을 걸으며 따 먹었던 오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지만,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보다 혀끝에 닿은 오디의 단맛이 더 강렬했던 그 기억.


이 에피소드는 우리가 생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중요한 함의를 던진다. 다혜가 아무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모험을 꿈꾸며 거창한 사랑을 기다릴 때, 할머니는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걷다 우연히 만난 오디의 단맛을 추억한다. 위대한 서사가 아니더라도 목적지 없는 방황 속에서 마주한 아주 사소한 감각의 기쁨이 때로는 한 생애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할머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루를 살아도 안 아프게 산다는 것

"하루를 살아도 안 아프게 살고 싶어."


할머니의 이 짧은 고백은 묵직한 울림을 준다. 우리는 흔히 젊음은 통증이 없는 상태라 믿고, 노년은 고통에 익숙해진 상태라 오해한다. 하지만 소설 속 잎을 모두 잃은 모과나무처럼 인간은 나이와 상관없이 각자의 계절에서 각기 다른 추위와 대결한다.


다혜가 모과나무집을 떠나며 마주한 눈은, 모든 허영과 자부심, 그리고 이별의 얼룩을 하얗게 덮는다. 눈이 내린다는 것은 어쩌면 지나간 계절의 상처를 덮고 다시 시작하라는 생의 다정한 명령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길을 잃는 것이 두렵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남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말처럼 길을 잃고 헤매던 그 위에서 우연히 따 먹은 오디가 맛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닐까. 삶은 대단한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이 아니라 잎을 다 떨군 겨울나무 사이를 걸으면서도 입안에 남은 단맛을 기억해 내는 일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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