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천천히 달리는 연습에 대하여

by 세잇
빨리 달리는 것에 익숙해진 우린
제자리에 멈춰 서는 법을 고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효율과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멈춤은 곧 도태를 의미하고 느려짐은 폐기의 충분조건이 된다. 하지만 천선란의 소설 『천 개의 파랑』은 그 고장 난 존재들이 서로의 부서진 틈을 맞대고 앉아 세상이 정해놓은 속도가 아닌 자신의 속도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정하게 그린다. 이 글은 내가 이 소설 속에서 발견한, 내 삶의 굳은살을 건드린 몇몇 밑줄에 관한 기록이다.



최소한의 방, 최대한의 소외

소설 속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가 머무는 기수방은 성인 한 명이 웅크려 앉을 만큼 비좁다. 그곳엔 누울 수도 발을 뻗을 수도 없다. 효율을 위해 설계된 로봇에게 휴식이나 안락함은 불필요한 낭비일 테니까.


기수(騎手) 방은 성인 한 명이 웅크려 앉을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누워 있을 수도, 발을 뻗고 앉을 수도 없을 만큼 비좁다. 하지만 이 방을 쓰는 기수는 누워 있을 이유도, 발을 뻗고 앉을 이유도 없다.


이 문장을 읽으며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현대인의 ‘기수방’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삶을 목적과 기능으로 제한하고 있는가. 잠은 때로 내일의 노동을 위한 충전일 뿐이고 식사는 에너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관계는 인맥이라는 자산으로 치환되지는 않던가. 발을 뻗고 앉을 여유조차 사치로 여기며 우리는 스스로를 누워 있을 이유가 없는 존재로 프로그래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콜리의 비좁은 방은 단지 로봇의 처지가 아니라 효율이라는 감옥에 갇혀 스스로의 영혼을 웅크리게 만드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고통, 생명이라는 증거의 비린내

천선란 작가는 SF라는 외피 아래 가장 뜨거운 생명의 본질을 묻는다. 작가는 주로 기술의 진보보다는 그 진보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소외되고 부서진 것들에 시선을 둔다. 코끼리의 상아가 사라진 것이 인간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비극적인 진화였음을 언급하며, 발전이 누군가를 배제하고 거세하는 방식이라면 그것은 결코 좋은 진화일 수 없다 말한다.


내가 추론해 낸 바를 말하자면, 고통은 생명체만이 지닌 최고의 방어 프로그램이다. 고통이 인간을 살게 했고, 고통이 인간을 성장시켰다.


우리는 고통을 제거해야 할 오류로 보지만 콜리는 그것을 생명의 핵심으로 짚어낸다. 고통이 있기에 우리는 멈춰야 할 때를 알고, 상처를 돌봐야 할 이유를 찾는다.


소설 속 '보경'은 소방관이었던 남편을 잃은 슬픔을 ‘비린내’라고 표현한다. 슬픔도 배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는데 그것을 놓치면 슬픔은 몸 안에서 고여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한다고.


슬픔이 비림으로 바뀌자 후에는 꺼내려고 해도 비릿해서 꺼낼 수 없어졌다. 그렇게 계속 몸에 담아두었다. 고여서 비려질 때까지. 끝끝내 썩어 마를 날을 기다리면서.


그리움은 기억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고 덩어리를 떼어내어 마침내 비워내는 과정이라는 보경의 고백은 지독하게 아프다. 우리는 그리움을 사랑의 연장선이라 믿지만 실은 살기 위해 죽은 자의 흔적을 도려내는 필사적인 수술에 가깝다. 그 비릿한 상실감을 견디는 것이 생명체만이 누릴 수 있는 고통의 특권이라는 역설은, 우리에게 살아있다는 것의 무게감을 다시금 일깨운다.



언어의 빈곤과 천 개의 파랑

휴머노이드 콜리는 만들어질 때 천 개의 단어를 입력받았다. 하지만 곧 깨닫는다. 자신이 아는 ‘파랑’이라는 한 단어로는 매 순간 변화하는 하늘의 진실을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을.


하늘은 매일, 매시간 색과 모양이 바뀌었다. 하늘은 파란색이었지만 가끔 보라색이나 분홍색, 노란색, 회색이 섞이기도 했다. 그렇게 섞인 색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콜리는 ‘파랑분홍’이나 ‘회색노랑’으로 단어를 합쳐서 불렀다. 세상에는 단어가 천 개의 천 배 정도 더 필요해 보였다.


우리의 언어가 너무나 빈약하기에 타자와 연결되지 못함의 근본적인 이유를 발견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복잡한 슬픔을 단순히 ‘우울’로 명명하고, 타인의 고군분투를 ‘실패’로 낙인찍는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존재가 가진 수천 가지의 색채는 사라지고 만다.


콜리가 발명한 ‘파랑분홍’은 사전에는 없겠지만, 그 순간의 진심을 담은 가장 정확한 언어다. 우리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이 정해놓은 규격화된 언어를 버리고 서툴더라도 자신만의 언어를 발굴해야 한다. 타인의 심장 박동을 유압기의 피스톤질로 느끼면서도 그것을 생명의 떨림으로 정의하는 콜리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기꺼이 오해받을 용기를 가진 다정한 발명일 것이다.



경사로, 혹은 다정한 장애물

휠체어를 타는 '은혜'에게 세상은 기술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거대한 벽이다. 사회는 은혜에게 수천만 원짜리 기계 다리를 달아 정상인처럼 걷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은혜가 원하는 것은 사이보그 다리가 아니다.


세상이 조금만 더 자신을 남들처럼만 대해준다면 은혜는 사이보그 따위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몇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가게로 들어갈 수 있는 리프트, 횡단보도의 여유로운 보행자 신호, 버스와 지하철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 휠체어를 끌어주는 휴머노이드나 사이보그 다리가 아니라.


진정한 진보는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를 수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든 수리받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시스템을 재건하는 일이어야 한다. 우리는 기술로 인간의 결함을 보완하려 하지만 사실 그 결함을 안고도 당당히 살 수 있는 경사로를 놓는 것이 더 인간다운 진보이지 않을까.


콜리가 마지막 순간에 하늘을 바라보며 낙마하게 된 것은 투데이라는 말의 연골이 닳아 없어지기 전에 그를 멈춰 세우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효율의 세계에서 이는 치명적인 오류지만 관계의 세계에서는 숭고한 희생이 된다. 콜리는 말한다. “연재는 실수가 기회와 같은 말이래요.”라고. 완벽한 프로그래밍을 거부하고 기꺼이 실수를 선택할 때, 비로소 우리는 기계적인 삶에서 벗어나 기회라는 이름의 생명을 얻는다.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

소설의 끝에서 경주마 투데이는 시야 가림막을 벗고 연골이 부서지는 것도 잊은 채 제 속도로 달린다. 그것은 1등을 하기 위한 속도가 아니라 완주를 못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는 속도, 즉 ‘자신의 속도’다. 콜리는 그 곁에서 고삐를 잡고 나란히 질주한다.


나는 세상을 처음 마주쳤을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천 개의 단어로 다 표현하지 못할,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커다란 몇 사람의 이름을 알았다. 더 많은 단어를 알았더라면 나는 마지막 순간 그들을 무엇으로 표현했을까. 그리움, 따뜻함, 서글픔 정도를 적절히 섞은 단어가 세상에 있던가.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처음 세상을 바라보며 단어를 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전부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마지막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파랑파랑하고 눈부신 하늘이었다.


콜리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하늘은 ‘파랑파랑’이었다. 그가 알고 있던 천 개의 단어는 사실 모두 하늘의 다른 이름이었다. 우리가 좌절이라 부르는 것, 슬픔이라 부르는 것, 시련이라 부르는 것들조차 모두 거대한 ‘파랑’이라는 삶의 물결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깨달음.


나와 당신의 문장은, 어쩌면 이 거대한 경주로 위에서 서로의 속도를 늦춰주는 다정한 장애물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서로의 휠체어를 허락 없이 밀지 않으면서 그저 옆에서 나란히 걷는 것. 보이지 않는 속내를 알 수 없기에 끊임없이 “즐거워하고 있는 건가요?”라고 물어봐 주는 것. 그 복잡하고 비효율적인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천선란 작가는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한 줄의 메모에서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너무 빨리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길가의 여린 풀잎을 보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느려져야 한다.


내가 그은 밑줄들은 결국 ‘멈춤’의 미학에 관한 것이었다. 1등을 하지 않아도, 완벽한 다리를 갖지 않아도, 비릿한 슬픔을 안고 살아가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그 길 위에서 얼마나 많은 ‘파랑’을 발견하고 얼마나 많은 존재와 눈을 맞추느냐는 것.


비록 우리의 시간이 제각기 다른 속도로 흐를지라도, 이따금씩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그 찰나의 기적을 믿으며 살아가고 싶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세상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등속 운동을 유지하며 자신에게 다시 생긴 삶을 이어갈 투데이처럼, 우리도 이제 각자의 파랑을 품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야 할 때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과 상실은 결국 하늘을 이루는 천 가지 파란색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오늘 당신의 하늘이 조금 흐리거나 어둡더라도 낙심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단지 당신의 삶이 또 다른 파랑으로 채워지는 중이라는 신호일 테니까. 당신이 오늘 마주한 파랑은 어떤 빛깔인가. 그 색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춰도 좋다. 그 멈춤이야말로 우리가 기계가 아닌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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