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진 연필 끝에서 시작된 질문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이름을 정자로 써 내려가는 행위,
그것은 단순히 문자를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부당하게 빼앗긴 세계를 통째로 탈환하는 혁명이다.
퍼시벌 에버렛의 소설 『제임스』는 140년 전 마크 트웨인이 창조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익숙한 무대의 뒤편, 그늘진 곳에 서 있던 흑인 노예 '짐'을 무대 정중앙으로 불러내어 '제임스'라는 온전한 이름을 돌려준다. 우리는 그동안 헉(허클베리)의 눈을 통해 짐을 보아왔다. 미신을 믿고 어리숙하며 백인 소년의 모험에 동행하는 충직한 조력자로서의 짐. 하지만 에버렛은 이 고전의 전제를 뒤엎는다. 짐은 사실 칸트와 로크를 논하는 지식인이며 백인들 앞에서는 생존을 위해 '노예 필터'를 거친 어눌한 말투를 연기하는 치밀한 전략가다.
작가인 퍼시벌 에버렛은 철학을 전공한 이력답게 작품 전반에 걸쳐 언어와 존재의 상관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는 흑인 작가로서 미국 사회의 인종 우월주의와 그 저변에 깔린 지적 허영심을 풍자와 철학적 사유로 해체해 온 사람이다. 『제임스』에서 그가 다루는 핵심은 '주체적인 언어의 소유'이다. 노예에게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금기시되었던 이유는, 글이 곧 생각의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가 기존의 억압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제임스가 도망 중에도 연필 한 자루를 목숨처럼 지키며 종이 위에 글자를 긁어 내려가는 장면은 눈물겹도록 엄숙하다. "만약 이 글자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삶도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고, 나 역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독백은, 존재의 증명이 타인의 인정이 아닌 오직 자신의 기록으로부터 시작됨을 시사한다.
우리는 흔히 자유를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임스의 여정은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던진다. 진정한 자유란 '내가 나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의 문제다. 제임스는 백인 소년 헉에게 "난 깜둥이가 아니야.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신분 해방을 넘어선 존재론적 선언이다. 타인이 규정한 '노예'라는 껍데기를 스스로 찢고 나와 '제임스'라는 고유한 내면의 지도를 그려가는 과정 자체가 곧 자유인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아프게 다가온 지점은 '기다림'에 대한 성찰이었다. "기다림은 노예의 삶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노예는 기다리고, 좀 더 기다리기 위해 또 기다린다." 지시를 기다리고, 음식을 기다리고, 구원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 어쩌면 우리 역시 현대판 노예 제도의 변형된 형태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스템이 정해준 순서를 기다리고, 타인의 평가가 내려지길 기다리며 내 삶의 주도권을 외부에 맡기고 있지는 않은가.
제임스는 이 기다림의 연쇄를 끊어내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천사'가 되어 가족을 구하러 나선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이름 그 자체인 '제임스'로 바로 선다. "내 이름은 내 것이 되었다"는 문장은 그래서 읽는 이의 가슴에 묵직한 파동을 일으킨다.
삶에서의 성찰은 결국 이 지점에 닿는다. 세상이 나를 무엇이라 부르든,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하는 이름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펜을 들고 일기를 쓰고 문장을 다듬고 내 생각을 조탁하는 행위는 제임스가 미시시피강의 진흙탕 속에서 연필심을 아껴가며 쓴 글자들과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 그것은 나를 소유하려는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격리시키고 오직 나만이 접근할 수 있는 내면의 서재를 구축하는 일이다.
『제임스』는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의 고통이 어떤 색깔인지,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타인의 입을 통해 들려주지 말라고. 스스로 써 내려가라고. 비록 그곳이 지옥의 한복판일지라도 자신의 손으로 적어 내려간 문장 하나가 있다면 그곳은 이미 지옥이 아니다. 그 문장은 이미 '더 푸른 땅'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줄 것이기에.
내 이름은 무엇인가.
나는 나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제임스가 쥔 부러진 연필 끝에서 시작된 이 질문이
오늘 밤 우리의 잠잠한 사유 속에서 길게 이어지길 바란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손에 쥔 연필 끝에서 매 순간 쟁취하는 것임을 잊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