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사랑 - 고수리

찌그러진 동그라미로 살아가겠다는 맹세

by 세잇

사랑은 결코 거창한 구호나 화려한 수식에 있지 않다. 다만 곁에 있는 이의 이불을 매만져주는 손길처럼 아주 구체적이고 선명한 실체로 존재한다. 고수리 작가의 문장들을 하나씩 내 삶의 여백에 옮겨 적으며, 나는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랑을 관념 속에 가두어 두었는지 깨닫는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2만 원에 사 온 낡은 교자상을 닦고 털보 아저씨의 외로운 소주잔을 응시하는 동사임을.


구도시와 신도시를 구분하는 법이 '하늘의 모양'에 있다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 나의 동네를 걷는다. 생활의 흔적이 묻어 있어 반드시 '동네'라고 불러야만 마음이 놓이는 장소들이 하나둘 사라져 간다. 어느 날 아침, 고물상의 간판이 내려가고 형광등 아래 홀로 남은 주인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며 작가는 울고 싶어지는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했다. 나 역시 그렇다. 사라지는 것들은 왜 마지막 순간에 가장 선명한 빛을 내뿜는 것일까. 그것은 그 공간이 품어왔던 수많은 사람의 '숨'이 일시에 터져 나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올여름 할 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이라고 나지막이 읊조린다. 이 문장 앞에 오래 멈춰 선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타인의 표정을 오해하고 그들 내면의 그늘을 외면하며 살아가는가. 만원 전철에서 손잡이를 꽉 붙들고 버티는 청춘의 발뒤꿈치를 보며 그 말랑한 살이 굳은살로 변해가는 과정을 연민하는 마음. 그것은 타인을 향한 단순한 동정을 넘어 우리 모두가 각자의 허들을 넘으며 서로의 '허들링' 속에 보호받고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내게도 아픈 질문을 던졌다. 등나무 의자와 낡은 인형 '리지'를 버리지 못하는 엄마의 미련은 사실 '너무 넘쳐서 못 버리는 다정'이었다. "적당히 해, 수리야. 할 때는 최선을 다하되 너도 힘들 수 있으니 적당히 해"라고 말해주는 엄마의 목소리. 효율과 성취가 종교가 된 세상에서,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유일한 품. 작가는 젊을 때 젊은 줄 모르고 예쁠 때 예쁜 줄 몰랐던 엄마의 시간을 복원해 내며 이제는 아이처럼 작아진 엄마를 안아보는 서글픈 온기에 대해 말한다. 그 온기는 결국 내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부력이 된다.


나는 작가가 인용한 김창완의 '찌그러진 동그라미' 이야기를 유독 아낀다. 세상살이는 자로 잰 듯 떨어지지 않고 우리가 그린 동그라미들은 저마다 조금씩 일그러져 있다. 하지만 그 찌그러진 모양이야말로 우리가 온 힘을 다해 하루를 살아냈다는 증거가 아닐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낙천적인 쨍쨍함이 내 마음의 구김살을 미용실 수건처럼 탁탁 털어 말려주는 기분이 든다.


어른이 된 나의 아픈 구석들은 모두 울지 않는 아이가 준 것들이라는 고백을 읽으며, 내 안의 어린아이를 비로소 마주했다. 울어야 슬프고, 울어주어야 비로소 그 슬픔이 완성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왜 어른이 되어서야 겨우 배우는 것일까. 징그러울 정도로 아프게 울어보고 나서야 내 안의 울지 못했던 아이를 안아줄 수 있구나.


사랑은 먼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앞에 놓인 도토리 같은 소소한 기억들을 줍는 일이다. 쓸모를 구하지 않아도 귀엽고 즐거운 순간들, 비록 낡은 채소다지기 하나를 물려주는 겸연쩍은 삶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부지런한 시간의 모양을 사랑하고 싶다.




"누군갈 사랑하는 한 노력해야만 하고, 노력하는 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작가의 이 문장을 마지막으로 갈무리하며

내 삶의 문장을 다시 쓰기 시작한다.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숨을 내쉬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는 정성스러운 노동이라는 것을.


찌그러진 동그라미 같은 내 얼굴로

오늘 만나는 타인의 그늘을 조금 더 다정하게 읽어주기로 마음먹는다.


나에게 닿을 듯 말 듯 밀려오는 파도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는 이제 도망치지 않고 이 선명한 사랑 앞에 오도카니 서 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