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나를 지키는 방식
흔한 퇴근길. 저녁은 무얼 먹을지 묻는 아내의 메시지에 ‘아, 땡기는게 있나 보구나’ 싶어 한껏 가동해 보는 두뇌와 이경규만큼이나 움직여 보는 눈동자. 몇 번의 스무고개 같은 질문이 오가다 김치전으로 퍼즐을 맞춘다. 이 정도 시도에 통과됨을 나쁘지 않다 자축하며, 나이 지긋한 두 자매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가게를 향해 누르는 다이얼. 김치전 하나 포장해 달라 부탁하니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복명하시는 큰 사장님의 어감이 정겹다. 두 뺨을 얼려 붉히고 두 손이 절로 주머니를 향하게 만드는 찬바람을 지나 가게에 도착한다.
전화로 주문했다 통성명을 밝히니 뭉근히 밝아지는 작은 사장님의 미소. 일회용기를 담은 검은 봉지를 가리키시며, '고기 음~청 넣고 양도 넉넉하게 끓이셨'다며 한껏 부풀려 건네시는 자신감. 네? 끓여요? 김치전 주문했는데요?
이내 당황하시는 두 사장님. 주문전화를 받고 작업을 지시한 자와 요리를 수행한 자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영 싸늘하다. '김치찌개 이거 정말 맛있게 끓였는데…' 김치전 말고 찌개도 한 번 잡솨봐라며 이내 나에게 돌아오는 화살.
당연히 다시 만들어달라 요청하면 될 텐데, 분명 황당한 상황임에도 거절이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바깥의 찬바람이 무색하게 손이 젖어든다. 김치전에 막걸리 한 잔을 원하던 아내와 전 대신 찌개를 종용하는 사장님 사이를 저울질하다 용기를 낸다.
못난 성격을 탓하며 새로 만들어지는 김치전을 기다리다, 결은 다르지만 내게 서로 다른 형태의 용기를 보여주었던 소설 속의 두 주인공이 떠올랐다.
박서련 작가의 『체공녀 강주룡』에는 1930년대에 공장 노동자로서 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다 평양의 을밀대 기와지붕 위에 올라 고공농성 벌인, '모단-걸'이고 싶었던 강주룡을 그린다. 80여 년 전의 일제치하에서 총칼찬 경찰과 자본가들의 압제가 얼마나 두려웠을까. 계급과 인권에 대해 박식하다는, 소위 말하는 '에리뜨' 들도 행하지 못한 투쟁인데. 배우지 못했으나 노동자가 으뜸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과 주변동료의 부당한 해고에 내가 잘못될 걸 알면서도 올랐을 을밀대를, 소설 말미에 "저기 사람이 있다"라고 표현했다. 가슴이 시리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북아일랜드에서 다섯 딸아이를 키우며 아내와 넉넉하진 않지만 석탄 목재상으로 하루하루를 꾸려나가는 펄롱의 이야기다. 매춘부, 미혼모, 고아 등 여성과 아이들을 보호하고 돌본다는 명목으로 세워진 수녀원 산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강제노역과 학대를 자행함에도 모두가 묵인하는데. 몰래 도망쳐 나온 아이를 도와, 거리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며 세상에 맞선 펄롱 만의 용기.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책임이 무거움에도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아닌걸 아니라 말하고 행할 수 있는 용기 한 줌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용기야 말로 나를 지키는 한걸음이지 않을까.
오늘도 나를 지키기 위한 용기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길.
- 김치전은, 막걸리와 함께, 그저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