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도 힌트를
스몰토크에 대한 의무감 같은 거려나. 게임 뭐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종종 듣게 되는데, 사실 대답할 만한 게 없다. 재주가 없어서. 오락실과 콘솔, 비디오 게임 시절을 겪으며 PC게임으로 아직까지 건재한 리니지부터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같은 대작을 필두로 애니팡, 포켓몬 고에 이르는 모바일 게임까지 잘해보려는 노력에 들인 돈과 시간을 환산하면 중형차 한 대쯤 샀을 법하건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재주가 없다는 걸 깨우쳤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게임을 잘하고 싶었던 마음을 돌아보니 상대방을 이겨서 성취감을 만끽한다거나 승부욕을 채우고 싶었다기보다, 주변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내게 게임이 존재했다고 할까. 그렇지. 뭘 알아야 대화가 되고 뭘 같이 해봐야 공감대가 형성되니까. 사실 생각하는 만큼 손이 따라주지 않아서, 못할 바에야 안 하는 게 낫겠다는 심산으로 멀리하게 되었나 보다.
그렇게 게임을 멀리하게 되면서 자투리 시간을 보낼 무언가로 선택한 게 책이다. 신입사원 시절, 한 주의 절반을 회식으로 보내던 일상이 스스로 한심해 보였달까, 다음날 온전한 컨디션으로 업무에 임해야 하건만 취기로 빈 하루를 보내는 게 아까웠달까. 변화가 필요하겠다 싶어 결심한 것이 ‘월급에 5%는 나에게 투자하자’ 여서, 그 5%를 사고 읽으며 허한 마음과 빈 시간을 달랬나 보다. 있어 보이기도 하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투리 시간 때우기 용도로 2년째 지속하고 있는 게임이 있으니, 바로 스도쿠 되시겠다. 스도쿠 룰이야 뭐 가로세로 세 칸짜리 네모 박스에 1부터 9까지 숫자들이 들어차는데, 이 박스 아홉 개가 정사각형 모양으로 모여 가로줄 또는 세로줄에 겹치거나 빠지지 않게 넣어 완성하는 것이니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한 번이라도 시도를 안 해본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숫자 놀음이라 게임이라고 하기에 약간의 거리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릴 적부터 수학을 좋아했다 해야 하나 규칙을 찾는데 관심 있었다고 해야 하나. 아홉 살에 마방진의 원리를 스스로 깨우치고 몇십 칸의 마방진을 채운게 대견해서 동네방네 자랑하다가 그거 원래 규칙이 있는 거라고 콧방귀로 응수하던 동네형 덕분에 머쓱했던 일도 있고, 명절에 방문하던 큰 집에 방치되어 있던 큐브와 설명서를 받아 들고 한두 시간쯤 앉아 조물거리다 면면의 색을 맞춰놓기도 하고, 페르마의 정리니 리만 가설이니 하는 수학난제들을 (지가 뭐라고) 정복하겠다는 맘에 샤프심 꽤나 분질렀달까.
하다 보니 스도쿠란게 따로 공식이 있는 건 아니더라. 누가 봐도 3 밖에 들어갈 데가 없는 칸부터 채우기 시작해서, 이 네모엔 7이나 9가 꼭 들어가야 하니 이와 면한 저 줄 끝엔 4가 차지하겠구나 하는 가정법들이 모여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랄까.(음 재밌군) 게임이다 보니 난이도가 나뉘는데, 채워야 하는 개수가 많을수록 어려워진다. 쉬움부터 시작해서 차츰 보는 눈이 넓어지다 보면 보통 어려움 전문가 마스터 극한(음?)으로 이어지는 난이도를 경험하게 되는데, 극한은 도저히 못하겠고 현재까지는 전문가나 마스터쯤 되는 레벨을 오분 십 분쯤 쥐 나도록 머리를 굴리다 보면 어느새 완성이 된다.(역시 재밌다고 해야 하나)
스도쿠를 하다 보면 곤란한 상황이 두 가지가 생기는데, 하나는 두툼한 손가락으로 인해 분명 8을 놓을 자리에 7이 눌려 세 번의 실수 횟수를 채운다거나,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못 풀겠다 싶게 난관에 봉착하는 순간이 서너 번의 시도에 한 번쯤 생기게 되어 '힌트'를 누를지 말지 고민하게 되는 상황이랄까. 두툼한 손가락이야 조상탓하며 각별한 주의를 요하면 되겠으나, 힌트를 누르고 싶은 마음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주체하기가 어렵던데. 꾹 참고 계속하다가 20분을 넘기기도 하지만, 버튼을 누르고 나면 막힌 혈이 뚫리는 기분이기도 하고 생각하지 못한 가정법에 혀를 내두르기도 한다.
힌트 버튼을 바라보다 보면 내 삶에도 누가 이 버튼을 하나 달아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책임져야 할 상황들과 해결해야 할 일들은 왜 이렇게나 많아지는지. 인생의 순간들에 맞이하는 어려운 문제에 정답이 있다면 좋으련만. 12년간의 학업을 마치고도 끊임없이 찾고 배우며 꾸역꾸역 지나왔으나 남는 건 후회이고 아쉬움이며 안타까움은 아닐는지. 물론 삶에서 각자에게 주어지는 문제에 정답이 있지도 않겠거니와 시험에 들 때마다 온전히 감내해야만 하는 시간이 괴로워져서 힌트 버튼을 찾게 된달까.
그럴 때마다 책에서 위안을 찾고 한숨 돌리며 그나마 나아갈 힘을 얻게 되는데, 『나태주의 행복수업』만큼 보듬어주는 책이 있을까 싶다. 책을 쓴 김지수 기자(작가)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일터의 문장들』로 접하긴 했으나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라는 인터뷰어로 유명하시다. 빌 게이츠, 말콤 글래드웰부터 이어령, 오은영 박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명인들과의 인터뷰에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사이트나 사고의 전환점이 될만한 지점들을 자기만의 필체로 전해준다. 『나태주의 행복수업』도 서울사람 김지수가 공주의 풀꽃문학관을 가꾸며 살아가시는 나태주 시인을 찾아가, 겨울을 지나는 누군가에게 봄을 담아 알려주는 인터뷰 집이랄까. 책을 보는 내내 나태주 시인이 전하는 이야기에 마음을 추스르고 위안받을 거리들이 한가득하다.
저들을 시기하지 말고 선망하자. 그래서 그쪽이 높아지면 나도 조금씩 높아지려고 노력하자. 내가 까치발을 디뎌서 상대하고 비슷하게 되는 것이 나는 선망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정 안에서 계속 선망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상대에게 잘 맞추려면 두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시한부와 거리. 열 사람을 만나든 한 사람을 만나든, 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해요. 너무 가까이 있으면 집착하거나 함부로 하게 되죠. 상대가 잘살도록 방해하지 않을 거리, 축복할 거리, 비켜줄 거리를 확보해야 합니다. 일례로 나와 독자 사이에도 마찬가지예요. 한두 사람이라도 내게 다가오면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하늘에 흐르던 별이 나에게 들렀구나. 사막에 핀 꽃이 내 앞으로 왔구나.'
맞아요. 배고프기에 밥을 찾고 목마르기에 물을 찾지요. 인생 자체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행복을 찾는 거예요. 예수 시대에는 긍휼이 없었고 석가 시대에는 자비가 없었고, 공자 시대에는 인(仁)이 없었어요. 에리히 프롬이 '사랑이 학습'이라고 한 것처럼 행복도 학습이에요. 노력해서 억지로, 한 번에 안 돼도 또 한 번 억지로, 행복해질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작은 기쁨들로 큰 고통을 메우다 보면 조금씩 살만해지고 평안해지는 것, 그게 우리가 부르는 행복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그러셨어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고, 가장 부자인 사람은 자기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고, 가장 현명한 사람은 늘 배우는 사람이라고.
타인의 판단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긍정할 때 인간은 당당해진다. '나는 약하다', '나는 외롭다', '나는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정답이 어디 있겠는가. 너무 잘하려 애쓰기에 힌트라도 주어졌음 하는 바람이 생기는 것이겠지. 오랫동안 나를 붙잡고 있는 상념이 있다면, 잘 풀리지 않아 애태우며 동동 발 구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잠시 멈추어 크게 숨 한 번 고르고 또 걸으면 되지. 뭔가 부족하기에 찾는 것이니 억지로라도 행복하려 하면 되지.
오늘도 다짐 한 스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