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고 있고 있는 존재
전새벽 님의 편지를 통해 다카노 가즈아키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새벽님은 『6시간 후에 너는 죽는다』라는 소설을 추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카노 가즈아키의 책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제노사이드』를 먼저 읽게 된 건 행운이었을까 객기였을까. 책을 읽는 내내 오랜만에 험한 말(?)을 많이 내뱉었던 게 얼마만이었는지. 정말 미쳤다. 놀라운 구성의 미친 소설이라서.
콩고와 일본, 미국을 오가며 전개되는 이야기의 발단은 하이즈먼이라는 학자가 2-30년 전쯤에 쓴 '하이즈먼 리포트'라는 인류 멸망 보고서인데, 핵전쟁, 기후변화 같이 인류를 위협할 요소들이 쓰여있다. 문제는 하이즈먼 리포트의 마지막 챕터. 인간의 지적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인 신인류의 등장이, 지금의 우리 인간을 말살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때마침 아프리카 콩고의 깊숙한 정글 어디쯤인가에 손발은 짧고 머리는 크며 고양이 같은 눈을 가진, 마치 E.T를 닮은 요상한 생명체가 감지되었다는 보고가 미국 안보회의에 제기된다. 미국 대통령 번즈는 이 신인류에 대한 위험성을 보고 받고 코드네임 '네메시스 작전'을 지시한다. '네메시스 작전'은 신인류뿐만 아니라 신인류와 행동반경을 같이하는 수십 명의 콩고부족, 그리고 그 부족에서 신인류를 보살피며 연구하는 나이젤 이란 학자까지도 제거하려는 목적이며, 이를 위해 예거, 마이어스, 개럿, 믹이라는 네 명의 용병을 콩고로 급파한다.
근데 이 신인류라는 녀석이 독특하고도 놀라운데, 콩고부족의 DNA 이상현상으로 태어나 세 살이 안 되는 생에 이미 현생 인류가 이룩한 모든 지식과 언어를 습득하고 응용할 수 있는 지능을 가졌다. 뭐 물론 그 깊고 깊은 정글에서도 위성통신으로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나이젤이란 학자의 보호 덕분이기도 했겠지만. 수학자 베른하르트 리만에서부터 촉발된, 소수의 법칙으로 만들어진 최고 강도의 암호체계를 손쉽게 깨뜨리는 건 기본이고, 감각을 넘어 물리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자연환경의 흐름까지도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탐나더라. 마치 히가시노 게이고의 『라플라스의 마녀』라는 소설에서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를 즉각적으로 분석하고, 그다음 순간에 어떻게 될지를 순식간에 계산해 낼 수 있는 겐토와 마도카 같은 능력이랄까.
아무튼 이 『제노사이드』는 진화한 신인류를 지키려는 편과 없애려는 미국정부 사이의 이야기인데 신인류 편은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이를 지키는 쪽에선 자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일본에 사는 제약화학 대학원생 겐토다. (그러고 보니 얘도 겐토 구나) 바이러스 학자인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는데, 죽은 아버지가 부재를 예상했는지 슬퍼할 새도 없이 아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의 유언장을 보내놨더랬다. 엄마 말 잘 듣고 양지바른 곳에 묻어달라거나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끝났다고 썼으면 좋았으련만. 노트북 두 대와 비자금 500만 엔을 보태며, 모르는 미국인이 조만간 너를 찾아올 테니 그때까지 '폐포 상피세포 경화증'이라는 피읖 네 개 만으로도 어려워 보이는 난치병을 고칠 특효약을 다 쓰러져가는 아파트로 위장한 실험실에서 2-3개월 안에 만들어달란다.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그렇게 건네받은 노트북엔 세상의 기술로 만들었다고 믿기 힘든 신약개발용 프로그램이 설치가 되어 있고(나중에 알게 되지만, 먼저 태어나 숨어 사는 신인류가 만들었음), 이 노트북으로 겐토둥절 할 새도 없이 신약개발에 돌입한다. 이 노트북이 콩고의 학자와 연결되어 있는지, 겐토는 이유도 모른 채 이를 감지한 FBI와 일본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는데.
이 급박한 와중에 콩고에 뛰어든 네 명의 용병. 사실 이 네 용병은 콩고에 치사율 높은 신종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이 돌고 있어 감염이 의심되는 콩고 부족뿐만 아니라 함께 생활하는 학자도 없애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었는데 이건 또 작전명이 가디언 프로젝트다. (그러니까 결국 미국은 전염병 확산방지 목적의 가디언 프로젝트로 위장한 신인류 제거 네메시스 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 이 중에 대장격인 예거는 공교롭게도 일곱 살 난 아들이 '폐포 상피세포 경화증'을 앓고 있단다. 이 병이 희한한 게, 10만 명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희귀병이면서 8살까지 생존한 사례가 없다고. 치료비에 보탬이 되고자 수당 높은 알바로 받아들인 일자리이건만. (밥벌이의 어려움이란...) 심지어 괴생명체를 만나게 된다면 즉시 사살하고, 바이러스에 걸린 콩고 부족을 만나기만 해도 감염될 수 있으니 작전 종료 후에 맞으라고 백신도 나눠 받는다.(이게 사실 사약이더라) 강 넘고 사막을 건너 바이러스 걸렸다는 콩고부족을 찾았더니 웬걸. 좀비처럼 변해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부족민들과 나이젤이라는 학자. 그리고 E.T. 를 닮은 신인류와 조우한다.
줄거리를 소개하다 보니 책을 죄다 옮겨 적을 것만 같기에, 인상 깊은 지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네메시스 작전이 실패하길 마음속으로 바라는 작전 지휘관 루벤스가 감시의 틈을 뚫고 하이즈먼 리포트를 쓴 당사자인 하이즈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대략 20만 년 전쯤 출현한 인류가 뇌의 용적도 더 크고 신체발달도 더 잘된 네안데르탈인을 멸망시킨 원인은 현생 인류가 다른 인류와의 공존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이고, 이는 인간성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결국 잔학성이며, 모든 생물 중에 인간만 같은 종끼리 제노사이드를 행하는 유일한 동물이란 견해를 작가는 하이즈먼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돌아보니 우리 인류는 얼마나 많은 제노사이드를 만들어 냈던가. 20세기가 되도록 행해진 노예무역을 위해, 2차 세계대전을 빌어 이루어진 유대인을 향한 나치의, 일본의 관동대지진에서 지진을 빌미로 조선인에게 겨누어진 과녁들까지. 인간이라는 종이 얼마나, 그리고 언제까지 피부색, 종교, 이데올로기, 애국심을 앞세워 집단이라는 틀에 자신을 욱여넣고 다른 집단을 구분하고 경계하고 있는 것인지 돌아보게 된다. 정말 인류는 '성악설'에 기반하고 '이기적 유전자'를 몸에 감고 태어나는 것일까.
뤼트허르 브레흐만이라는 네덜란드의 인류학자는 『휴먼카인드』라는 자신의 책을 통해 이렇게 밝힌다. 두툼한 책을 짧게 요약하자면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이야기다. 『제노사이드』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을 멸망에 이르게 한 원인이 현생 인류의 잔학성이라고 했겠으나, 『휴먼카인드』에서는 인간이 가진 '상상할 수 있는' 힘 덕분에 유인원과 달리 없는 것을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을 떠올리는 능력으로 조직을 구성하고 사회를 만들었으며, 조직화의 과정에서 구성원으로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네안데르탈인에 비해 보다 온순하고 서로 친밀해졌다는 것이다. 이 우호적인 인류의 성향이야 말로 자연이 선사하는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며 생존할 수 있었던 우리의 무기이고, 유대와 화합을 기반으로 협동하는 존재이기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스포일러가 될지 모르겠으나) 신인류의 신적인 능력으로 네메시스 작전은 실패한다. 하이즈먼을 통해 인류의 잔학성을 논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생각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소설 말미에 예거의 생각을 빌어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금부터 나는 지구로 돌아간다. 모든 생명을 품고 기르고 있는 어머니의 별 위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증오하고, 선과 악의 틈에서 흔들리고 있는, 저 회색 세계로.
홉스가 주장하는 성악설을 넘고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밝힌 악의 평범성을 넘어, 지금의 우리 인류는 우리가 가진 선한 본성의 터울로 서로를 잇고, 그로 인해 존재하며, 아픈 과거를 잊고 넘어서며 존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나 또한 잇고 있고 잊는 존재로서의 인간이고 싶다.
그래서 '세잇'이라는 필명으로 브런치 활동을 이어가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