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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 마쓰이에 마사시

모든 것은 나의 손안에

by 세잇

마음속이 시끄럽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고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현실은 나에게 남아 자꾸 머릿속을 뒤섞는다. 알고 있는 것과 다스리는 것의 간극이 멀고 가까운 정도가 얼마나 비워내고 살아왔는지에 대한 바로미터는 아닐는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되고, 스스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하게 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곱씹게 된다. 과거는 히스토리고 미래는 미스터리며 현재는 선물이라지만. 히스테릭한 현재로 인해 과거도 미래도 돌아보고 예상하는 게 부질 없어진다.


속이 시끄러울 땐 고주망태가 되도록 잔을 비워내는 게 도움이 안 되던데. 물론 아무 생각 안 나도록 몸을 움직이거나 일거리 취미거리를 찾아 시간을 채우는 것도 방법이 되겠으나 그때뿐인지라, 분을 삭일 방법을 찾다 메모장을 열었다. 여름이 다가오면 소개 글을 써야지 하고 두었던 책.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소설인데, 스펙터클한 전개도 눈에 띄는 사건도 톡톡 튀는 기승전결도 없는 것이 슴슴한 평양냉면 같달까. 그럼에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다만 평양냉면을 닮아서. 점심에 분명 먹고 왔는데 자려고 누우면 떠오르는 것처럼, 일상의 특별함이 아니라 소소한 평범함이 가진 밀도가 문장 전체에 녹아 있다.


건축학과를 갓 졸업한 주인공 사카니시가 빡빡한 조직생활과 대학원 진학 대신 선택한 '무라이 설계사무소'에 취직하며 소설은 시작된다. '무라이 건축사무소'의 수장인 '무라이 슌스케'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고 하니, 1967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열린 20세기 건축전에서 일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소개될 정도로 능력자이면서도 건축의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건축은 사람을 향해야 한다'는 자신만의 철학으로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다. 이 정도 스펙이면 욕심을 부려봐도 되겠건만. 대형 건축회사를 차리고도 남겠건만. 소소한 건축사무소에서 올곧은 동료들을 모아 꾸려나간다.


무라이 슌스케와 그 동료들이 건축을, 일을,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소설 곳곳에 숨어 있다.


잘된 집은 말이야, 우리가 설명할 때 했던 말을 고객이 기억했다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게 되지. 우리 건축가들의 말이 어느 틈엔가 거기 사는 사람들의 말이 되어 있는 거야. 그렇게 되면 성공인 거지.


..."혼자서 있을 수 있는 자유는 정말 중요하지. 아이들에게도 똑같아.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평소에 속한 사회나 가족과 떨어져서 책의 세계에 들어가지. 그러니까 책을 읽는 것은 고독하면서 고독하지 않은 거야. 아이가 그것을 스스로 발견한다면 살아가는데 하나의 의지처가 되겠지. 독서라는 것은, 아니 도서관이라는 것은 교회와 비슷한 곳이 아닐까? 혼자 가서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장소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한 점의 틈도 그늘도 없는 완벽한 건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은 아무도 못 만들어. 언제까지나 주물럭대면서 상대방을 기다리게 할 만한 것이 자신한테 있는지, 그렇게 자문하면서 설계해야 한다네."..."고객이 시키는 대로, 납기를 지키기 위해서 일하라는 건 물론 아닐세. 만일 고객이 불평하거나 변경해 달라고 했을 때 마감이 임박할 때까지 주물럭거리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 자네가 잘못한 경우도 있을 수 있어. 그런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라도 늘 시간은 봐둬야 하네. 그런 의미에서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무라이 설계 사무소는 여름이 되면 짐을 싸고 숲 속 여름별장으로 떠난다. 새들의 노랫소리로 가득한 고즈넉한 숲 속에서, 아침이면 어김없이 산책길에 나서는 무라이의 발소리와 삐걱이는 현관문 소리로 시작되는 여름별장. 국립현대미술관 설계경합을 목적으로 도착한 여름별장은 조용하고 아늑해 보이지만 설계사무소 직원들의 손에 녹아든 업무습관은 비할 데 없이 세밀하고, 톱니처럼 얽힌 직원들의 설계작업은 각자가 1인분의 역할을 소화해 내지 못하면 프로젝트를 제대로 마무리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가득하다.


... 나중에 유키코에게 물었더니 오전오후 합해서 최대 열 자루 정도 연필을 쓰는 것이 일의 정확성도 지켜지고, 연필도 정성껏 다루게 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보다 더 깎아야 하는 것은 필압이 너무 강하거나 너무 난폭하거나 너무 서두르거나 그중 하나로, 즉 아무 생각 없이 일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선을 계속 긋고 있으면, 어느 지점부터 의식이 흐트러지는 때가 있다. 그 틈을 노려서 실수가 미끄러져 들어오니까 연필이 어떻게 닳는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설계도는 한 군데라도 놓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 버리면 다시 그리는 데 두 배 이상의 힘이 든다.


선생님은 내 의문에 미리 대답하듯이 말했다. "가구는 좀 더 뒤에 생각하자는 이구치 군 생각도 이해하지만, 건축이라는 것은 토털 계획이 중요하지. 세부적인 것은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 결코 아니야. 세부와 전체는 동시에 성립되어 가는 거야."... 무의식의 영역을 빼놓고 사람에게 태아시절의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이 손가락이 예전에 그렇게 세계를 탐색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서 손을 움직일 뿐만 아니라 손을 움직이는 것이 생각으로 연결된다. 선생님의 건축 작법은 그 양쪽으로 성립되어 있다.


"덮어놓고 죽죽 조각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 노래한다는 것은, 즉 숨을 쉬면서 손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니까 손놀림이 가벼웠을 거야. 사람은 말이야, 그냥 의자에 앉아 있을 때조차 어깨에 힘이 들어가거든. 그렇지만 숨을 쉬면서 몸의 긴장을 풀면, 어깨에서 힘이 빠지지. 호흡을 편히 하면 어깨도 굳지 않아."


안타깝게도 무라이가 뇌출혈로 쓰러지며 설계경합에는 결과물을 제출하지 못하고 무라이는 더 이상 설계사무소를 운영하기 어려워지게 되는데, 사무소 직원들의 안녕과 무운을 바라며 무라이는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


일은 사무소 안에는 없고, 여러분의 손안에 있습니다.
부디 좋은 건축 일을 계속해주길 바랍니다.


모든 것은 내 손안에 있다.

속 시끄러운 것도 결국 내 안에 있고, 이걸 만든 것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도 나에게 달린 일이다.

그리하여 내가 나에게 바란다.

부디 하루하루를 쌓아 계속 나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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