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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 장류진

저는 잘 지냅니다

by 세잇

코에 바람이 든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여행과 관련된 에세이가 눈에 들어올 리 없지...


저마다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겠으나 보통 책을 선택하는 기준은 1. 그간 읽어 머리에 콕 박힌 작가 분들의 출간 소식을 듣고 책을 고르거나 2. 성향이 비슷하다거나 책을 좋아하는 분들이 추천해 준 책을 담아두었다 읽는다거나 3. 유튜브 알고리즘이 골라준 소개 내용을 보다가 맘에 들어 집어든다거나 4. 밀리의 서재에 새로 나온 책을 스크롤하다 소개글이 마음에 닿고 첫 몇 문장이 끌리면 주욱 읽어 내려가는 편이다. 그런데 장류진 작가의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이라는 에세이는 그 어디에도 들지 않았음에도 내 앞에 놓인 걸 보니, 코에 바람이 든 게 분명해...


장류진 작가님.

세 편의 소설을 쓰셨다는데, 모르겠다(작가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표지가 설원이고 점점이 반짝이는 보랏빛이 흩뿌려있다(예쁘다). 펼쳐 들었더니 핀란드 이야기다(세상에). 교환학생 때 이후로 15년 만에 아이 둘 키우는 절친과 단 둘이 떠난 리유니언 여행이란다(부럽다).


핀란드.

지구 반대편의 거리만큼이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나라이지 않나. 아는 거라곤 죽기 전에 오로라를 보는 게 많은 사람들의 버킷 리스트라는 것과 백야와 극야가 번갈아 가며 사람을 괴롭히겠다 싶고, 북유럽 나라답게 복지가 잘 되어있겠다가 전부였는데, 이 에세이 덕분에 많은 게 달라지지 않았나 싶다. 생경한 자연과 그 자연에 순응하고 녹아들어 살고 있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마음씀과 손길이 궁금해져선 지구 반대편의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핀란드와 핀란드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된 몇 가지를 소개해 보자면 내 이야길 먼저 해야겠다.


겉보기에 두루뭉술하고 방실방실 해서 무던하고 쉽게 친해질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실제로는 낯도 좀 가리고 혼자 있어야만 비워진 에너지를 채우며 좁고 깊은 관계에 집중하는 성향이라, 일상에서 마주하는 주변인들과도 적당한 거리감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편이다. 그런데 핀란드 사람들이 딱 그렇던데. 적당한 거리감. 그래서 반갑지 않을 수 없더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내적친밀감이랄까.


외출을 하려는데 누군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으면 현관문 앞에 숨죽이고 있다가 엘리베이터가 떠난 다음에야 집 밖을 나선다든지, 좌석버스에 탔는데 모든 2인 좌석에 한 명씩 앉아 있고 내가 반드시 누군가의 옆자리에 앉아야 하는 상황에서의 난감함이라든지, 쇼핑하다 우연히 만난 지인과 실수로 인사하기라도 했다가는 쇼핑하는 내내 그를 피해 다녀야 하는 불상사에 처한다는 식의 고충 등. 이런 내용만 담은 『핀란드인의 악몽 2』이라는 핀란드 작가의 그림책이 시리즈로 있을 정도다.



그리고 이상하게 (남들이 보기에)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일에 집착하거나 디테일에 진심인 편인데 뭐 예를 들면, 땀 많은 발로 인해 신발에게 쉴 시간을 부여하느라 일주일 내내 다른 신발을 신기도 하고(다음날 날씨와 뭘 입느냐에 따라 미리 정해두어야 마음이 편함), 스마트폰 배터리가 80% 아래로 내려가면 뭔지 모르게 불안해져서 충전 케이블을 찾고, 보고자료 만들 때는 눈으로는 잘 맞아 보이는데도 굳이 개체 정렬기능을 활용해서 미묘하게 구성도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에 안도하기도 하고, 설거지하거나 샤워하는 시간보다 주변 물기제거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는 사람이라 작가님 에피소드를 보며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어 다행(?)스럽기도 했다.


나는 컵라면을 먹을 때 절대로 그 위에 나무젓가락만을 얹어두는 법이 없었다. 절대로. 반드시 뚜껑보다 더 넓은 면적의 무언가를 위에 누르듯 덮어주어야 직성이 풀렸다.
젓가락만 올리면 완전히 밀폐되지 않아 틈이 생길 테고, 그 틈새로 열기가 날아갈 것이고 그러면 라면이 제대로 익지 않을까 봐 걱정되기 때문에. 최적의 상태로 잘 익은 면발을 먹고 싶기 때문에. 컵라면 하나라도 허투루 먹고 싶지 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가장 맛있게 먹고 싶기 때문에.



꽃은 피었는데 서리는 내리고, 봄이 왔다는데 두툼한 외투를 다시 꺼내야 하는 날이 있는 편이라 올해의 우리나라 봄은 진짜 봄이 온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에 비할 바 아닐 만큼 핀란드의 겨울은 춥기만 한 게 아니라 일 년 중 7개월 정도를 추위와 함께 지내야 하다 보니 핀란드 사람들에게는 봄이 오는 것이, 드디어 긴 겨울이 지났음에 행복해하고 즐기는 모습이 귀엽더라.


대한민국에서 온 내 기준에서는 아무리 봐줘도 봄이지 여름이라고 부르긴 어려운 날씨, 얇은 트렌치코트나 후드티를 입는 게 마땅한 날씨에도 반팔이나 민소매를 입고 어떻게든 해가 비치는 테라스나 공원을 찾아 나서는, 때로는 잔디밭에 웃통을 벗고 누워 태닝까지 즐기는 핀란드인들을 발견할 때마다(스스로를 내향적이고 표현을 잘하지 않는 민족이라고 평가함에도 불구하고) 몹시 신나 보이는 그들을 마음속 깊이 귀여워하곤 했었다. 그래, 어둡고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나면 간만에 찾아온 이 햇살이 더없이 소중할 수밖에 없지.


봄이라고 성대한 축제까지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하염없이 쌓여가는 눈을 바라보며 ‘저기…… 눈이 내리고 있는데…… 아직 겨울인 게 아닐까?’라고 묻는 내게, 모두가 흐린 눈을 하고 ‘응, 아니야. 바뿌 지났으니까 봄이야. 조용히 해’라고 대답하는 것만 같았다.



작가와 친구, 류진과 예진은 정해진 기간 동안 정해놓은 루트를 정해진 대로 다니다가도, 서로의 마음이 맞아 마음 가는 대로 발길을 옮긴다. 헬싱키와 쿠오피오라는 지역을 두루 다니며 전하는 핀란드인들의 자연스러움과 세심함, 고집스러움이 음식, 사우나, 무민 캐릭터, 간결하고 실용적인 디자인 요소뿐만 아니라 건축물에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깜삐 교회'와 1930년대에 지어졌다는 '알토 오피스'는 너무 궁금해서 검색해 볼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 발짝만 나가면 들리던 복잡한 번화가의 소음이 일순간 잦아들고 순식간에 사위가 침묵 속에 잠겼다. 마치 바다 위 잠수정이 수면 아래로 푹 잠겨 들어가는 순간 맞이할 적막처럼. 로비에 비치된 브로셔에서는 반가운 궁서체의 한글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의 정체성을 한 문장으로 나타내는 문장과 함께.

‘누구든 이 예배당에서 평화와 고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아주 짧은 로비를 지나 캄피 교회의 메인 공간인 예배당으로 들어가니 한층 더 깊어진 고요를 경험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잠수정이 심해로 들어간 느낌. 처음 입장한 순간에는 모든 소음이 제거된 침묵에 압도되었지만 뒤이어 모든 장식이 제거된 시각적 이미지에 더 크게 압도되었다. 그것은 어떠한 ‘존재’에 압도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음, ‘무’로부터 압도되는 흔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깜삐 교회(출처: 구글 이미지 검색)



생각해 보면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을 말하기는 얼마나 자연스럽고 쉬워. 안 그래?

하지만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알토가 추구하는 그 ‘자연스러움’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들이고, 반복적으로 계산하고, 까탈스럽게 굴었을지가 보여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더라.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스러움’은 ‘자연’이 아니야. ‘자연’은 그냥 놔두면 되잖아. 거기 이미 존재하니까. 하지만 ‘자연스러움’은 다른 얘기지. ‘자연스러운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뾰족한 고민이 필요하겠지. 건물 전체가 곡선으로 구부러져 정원을 감싸는 형태의 알토 오피스는 무척 자연스럽고 아름다웠지만, 그런 형태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벽돌 하나부터 딱 원하는 각도로 구부러진 형태로 만들어야 하는 거잖아.


알바 알토의 오피스(출처: 디자인프레스)



열흘간의 핀란드 여정을 에세이와 함께하며 가장 부러웠던 점이 있다면, 학교만 같이 다닌 게 아니라, 핀란드에 교환학생으로 같이 왔던 것만이 아니라, 15년이라는 서로 다른 긴 시간을 보내며 이어져왔을,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작가와 생각하는 것 마저 똑같은 친구가 있다는 점이다. 여행에 대한 에세이인 줄 알았으나 읽는 내내 친구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는데, 에필로그에 내 생각이 그대로 담겨 깜짝 놀라기도 했고.


오랜 친구는 마치 기억의 외장하드 같다. 분명 내게 일어났던 일이지만 자주 꺼내지 않아 그곳에 있었는지도 잊은 일들을 친구의 입에서 들을 때, 왜인지 부끄러우면서도 든든하다. 내가 잊어도 예진이가 알고 있겠구나. 나의 일부분을 이 친구가 지켜주고 있겠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내가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심장마비가 와서 즉사하거나, 다리에 쥐가 나서 발버둥조차 못 치고 가라앉아 익사하거나, 갑자기 예상치 못한 파도가 밀려와 속절없이 휩쓸리거나 그 밖에 다양한 재해로 위기에 처할 수 있고 그걸 아무도 인지하지 못해 끝없이 펼쳐진 이 망망대해에 떠내려가 차디찬 발틱해의 물귀신이 될 수 있으니) ……나 들어가는 거 봐줘.”


같은 순간에 서로를 배려하며,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후회를 했다는 게 그리고 그걸 같은 순간에 고백했다는 게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다.



그런 사이를 동경하느라, 나도 모르게 지금 부족한 것을 찾고 있구나 싶어 괜찮은 건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할 수 있을 때에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때에 그러지 않았고

있어야 할 때에 있지 못했음을

이제는 알겠다.


흔들리지 말아야 할 때에 휘청거렸음을

참고 막아서고 망설이고 주저한 게 잃은 것은 아니기를

눈을 가리던 것들이 지나고 나니 선명해짐을

이제는 알겠다.



저는 잘 지냅니다.

누군가일 당신도 그러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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