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와 불꽃
“우리, 같이 잘래요?”
한밤중 문득 찾아온 이 질문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담겨 있을까. 사랑이란 말보다는 덜 아프고, 고백이라는 말보다는 덜 수줍은.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을 시작하는 문장은, 그렇게 조용히 마음을 두드린다. 나이 들고 나서야 꺼낼 수 있는 용기, 나이듦이 만들어낸 단순하고 명징한 욕망. 함께 누워 밤을 견디자는 제안은 곧 함께 삶을 견디자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반면 샐리 루니의 『노멀 피플』은 지금을 살아가는 밀레니얼세대의 더 복잡하고, 더 조심스럽고, 더 아픈 사랑 이야기다. 메리앤과 코넬은 사랑하지만 늘 어긋난다. 서로를 원하지만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마음을 내밀고, 상처 입히고, 다시 돌아온다. 이 둘에게 사랑이란 늘 불안정하고 조심스럽다. 혼자가 무서워 붙잡고, 함께 있음이 무거워 도망친다. 자기 자신조차 모르는 채 상대에게 의지하려는 사랑은 때때로 서로를 찌르고 만다.
이 두 소설을 나란히 놓고 보면, 우리는 어쩌면 사랑에 대해 두 번 배우는 건 아닐까 싶다. 젊은 날에는 사랑을 통해, 상대방이 바라보는 나와 내가 대하는 서로에 의해 나를 알아간다. 그리고 나이 들어서의 사랑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처음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사랑하고, 나중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이해하고 싶어서 사랑한다.
『노멀 피플』의 메리앤과 코넬은 서로를 통해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 한다.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지, 나는 괜찮은 사람인지, 내가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상대를 삼는다. 그러니 그들의 사랑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확인하고, 실망하고, 다시 기대한다. 사랑은 종종 질문이란 이름으로 변모하고, 대답이 되지 못한 채 끝나버린다.
반면 『밤에 우리 영혼은』의 애디와 루이스는 서로에게 대답이 되어준다. 더 이상 사랑을 통해 자기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서로가 가진 고독의 무게를 덜어주는 방식으로, 함께 누운 밤의 정적을 나누는 것으로, 그들은 사랑을 완성해 간다. 누구도 증명하려 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관계.
물론 노년의 사랑이 언제나 더 성숙하고, 젊은 사랑이 반드시 미숙하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이란 감정은 나이와 무관하게 늘 새롭고 늘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건, 삶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사랑은 더 이상 뜨겁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따뜻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로잡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으로.
젊은 날의 사랑은 불꽃이고, 나이 든 사랑은 불씨이지 않을까. 한쪽은 뜨겁게 타올라야만 살아 있는 것 같고, 다른 한쪽은 오래도록 꺼지지 않기 위해 천천히 타오른다. 우리는 어쩌면 불꽃처럼 사랑하다가, 불씨처럼 살아가는 연습을 하며 나이 들어가는 게 아닐까.
이 두 사랑을 함께 떠올리며 문득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떤 사랑을 해왔을까. 누군가의 밤을 건네받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스스로를 증명하려 사랑을 붙잡고 있는가. 사랑이란 결국, 나를 잃지 않고도 타인과 함께할 수 있는 용기를 배우는 과정일지 모른다.
그러니 사랑이 너무 아프다면, 아직 배우는 중이란 뜻일 테고. 사랑이 조용하고 편안하다면, 그 또한 배움의 결과일 테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 과정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나이와 상관없이, 서로의 밤을 조심스럽게 건네고, 또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