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또, 어김없이
붕어빵 심부름을 떠난 멀고도 가까운 동네 산책길. 봄이련가. 손바닥만 한 인형들이 가방에 대롱이며 아이들 마음만큼이나 흔들리는 걸 보니. 분명 새 학기의 개학날엔 눈이 펑펑 내렸더랬는데. 그늘에 남아있던 눈덩이마저 봄바람 일어 사그라들었나. 그 봄바람은 목련 몽우리를 움트게 하려고 불었는가. 조금쯤 얇아진 외투가 보고 싶었나 보다.
‘새벽수확 산지직송’을 외치는 과일가게 청년사장님의 목소리엔 딸기만큼이나 빨간 달큰함이 점점이 씨앗으로 박혀있고, 포장박스 뒷면에 곱게 적어둔 ‘후리지아 한 단 삼천 원’이란 글자는 꽃가게에 눈썹 하이얀 할아버지 사장님이 봄을 전하는 방법이려나.
봄바람 솔솔 불고 햇살은 따스해지는데 패딩점퍼에 꽁꽁 숨겨놓은 듯 마음은 아직 겨울의 한구석인 것만 같은 이 시기가 되면, 이 시기를 닮아 어김없이 생각나는 허은실 작가님. (시인이라고 해야 하려나) 한참 책을 좋아하고 싶다는 바램의 안테나가 '이동진의 빨간 책방’ 이란 팟캐스트를 찾아 주파수를 맞추던 시기에, 책소개보다 더 기다려지는 오프닝 멘트를 책임지던 허작가님. 오프닝 멘트만 모아 따로 쓴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을 넘고 『나는 잠깐 설웁다』 라는 시집을 지나 만난 『내일 쓰는 일기』라는 에세이.
지금도 제주에 사시지만, 불현듯 제주살이를 시작하며 제주에서 보낸 1년간의 기록. 제주살이의 고단함도, 시인으로서 작가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마음가짐도, 제주를 온몸으로 겪으며 제주가 가진 상처와 과거를 앞으로 에 담아내는 시선도 좋지만 그보다는 여덟 살 나린이가 1학년 1반 1번 초딩으로 계절에 따라 한 뼘씩 커가는 모습을 일기로 써 내려간 다정함이 더 애틋하게 남는다.
엄마가 시인이라서 그럴까. 고르고 골라 시인 엄마에게 전하는 단어와 문장이 심상치 않던데. 선생님 용서 해드렸냐는 물음에 ’그럼! 마음이 사르르 다 녹았어!‘라고 답하기도 하고, 종이는 잘 구겨지는데 구겨진 걸 펼 수는 있지만 흔적이 남는 것처럼, 내 마음에도 흔적이 쪼오금 남아 있어서 마음은 종이 같은 거라고 말하는 나린이. 간지러운 걸 못 참으면서도 울다 깨어난 엄마 곁에 다가와 ‘좀 웃게’ 간질여 달라는 그 아이의 마음엔 엄마가 봄을 심어 두었겠지. (내 아이는 아빠가 아재개그 중독자라서 걱정스럽기도)
서울의 하늘은 아직 미세먼지가 한가득이지만 다시 또, 어김없이 봄은 이렇게 오고야 만다. 나에게도 나의 아이에게도 기다렸을 누군가인 당신에게도 무언가로 기억될 봄이기를.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렇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꽃이나 보자고’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러니 꽃이나 볼 일이다. 바빠 죽기 전에.
그리고 이제는 알겠다. 좋은 것, 귀한 것,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을. 꽃을 보고도 싶었겠지만, 꽃과 단풍을 핑계로 나를 보고 싶었던 엄마를.
그러나 나는 모른다. 엄마와 좋은 것을 같이 보면서 ‘아, 예쁘다! 엄마 저기 서봐.‘ 그럴 날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를. 엄마의 말처럼 단풍이, 벚꽃이 그때까지 남아 있을지를.
다음 봄에도 꽃이 예쁘다고 전화가 올까. 그러면 당장 비행기를 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