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계란
친애하고, 친애하는 새벽 아우에게
(늦었지만) 연휴는 잘 보냈는지? 나는 연휴 끝자락의 어느 날엔가 에이형 독감이 시작되어서,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독감인지 확인하려면 병원에 가야 할 텐데, 그마저도 기력이 없어 주사 맞기 싫은 아이처럼 손사래를 치고 있었달까. 열은 오르고 삭신은 최홍만쯤 되는 사람한테 두드려 맞은 것 같고 비염으로 숨 쉬지 못해 잠이 엉망인 며칠을 보내고 왔어. 위생감으로 똘똘 뭉친 가족애로 인해 방 한구석에 코로나 시절처럼 격리되어서, 올드보이의 최민식 마냥 주는 밥 먹으며 ‘아싸 집안일 안 하고 며칠 놀 수 있겠구나’ 싶은 바람은 그저 침대 위 일장춘몽이었달까.
그 와중에 발견한 너의 브런치 알림이 얼마나 반갑던지. 부루 튼 눈으로 읽어 내려가다 참을 수 없어 댓글로만 생사안부를 건네고 이제야 답을 하게 되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와 무럭무럭 커갈 쌍둥이 덕분에 하루하루가 전투 같겠다. 아이는 하나도 힘들던데. 셋은 상상도 안돼. 내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100이 전부인데 33 씩 나눠주고 나면 나에게 남는 게 1 밖에 없는 삶을 사는 건 아닐까, 한 아이에게 온전히 100을 내주어도 눈에 시리게 안쓰러운데 1/3 만으로 이 아이들에게 마음을 제대로 전한 걸까 같은 안타까움이 아이 셋을 키우는 새벽이의 고민거리는 아닐지 가늠해 보게 되더라.
근데 희한하게, 내 주변에 둘, 셋씩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 더러는 고모부나 이모가, 또 어디선가에는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나 주변의 따스한 마음씀이 10, 20 씩 보태어 아이들에게 전한다거나 가끔은 지들끼리 투닥이며 5나 10쯤 서로에게 보태는 걸 보고 있자면 놀랍달까. 제일 신기한 건, 그 부모들을 보니 100인 줄 알았던 에너지가 150, 200이 되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더라구. 너도 이미 150, 200인 아빠가 되어 있는 것 같아 대견하기도 질투 나기도 해. (자꾸 100 200 하다 보니 무슨 당구 실력 같네.)
내 아이가 유치원 다닐 적에 나는 무슨 고민을 했는지 살펴보느라 오래된 메모들을 둘러보다 생각난 게 있어서 이야기할까 해. 아이가 친화력인지 자기만의 생존방식인지 모르겠는데, 바깥만 나서면 온갖 사람 동물 사물들에게 인사하느라 5분 만에 갈 거리를 30분씩 걸리곤 했거든. 근데 요 녀석이 잘 다니던 유치원에 가기 싫다는 거야. 그것도 월요일이랑 금요일만 되면 몸을 비비 꼬는데, 친구들과 싸운 건지 간식이 부족했는지 어디 아픈 건지 도통 모르겠더라고. 유치원 선생님께 여쭤봐도 아무 일 없다는데 환장할 노릇. 근데 또 잘 구슬려 지 맘에 드는 옷 입히고 양갈래 머리 땋으면 금세 마음이 풀어졌는지 운동화에 발을 꿰긴 했어. 나중에 알았지. 유치원 보내면 그 왜 있잖아 중간에 참관수업 같은 거. 알고 보낸 건 아니었지만 주 2회 수영을 배우는 유치원이었는데, 참관수업에도 수영 시간이 있었거든. 어푸어푸하길래 어이구 잘한다 싶었는데 금세 꼬르륵 가라앉아선 울더라니깐.
'물이 무서웠구나'
내 애만 울어재끼고 있으니 당황스럽긴 했어. 돌아와 다그치기도 했고 수영을 따로 가르칠까도 생각해 보고. 근데 가만히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다 알았어. 물이 무서운 게 아니라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마음 때문이라는 걸. 좋은 조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영시간을 보내는 게 마음이 버거우면 가만히 앉아 친구들 구경하고 응원해 주는 일도 멋진 일이지 않을까 하는 아빠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고. 물론 선생님께도 잘 말씀드리기도 했어 :) 아이에게 무언가 사정이 생길 때마다 어른으로서 부모로서 사실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 그래서 아이와 같이 클 수 있는 부모이고 싶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찾았던 것 같고.
그때 알게 된 책이 조선미 교수님의 『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워라』인데, 조선미 교수님은 워낙 유명하시니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오은영 박사님과 150도 정도 틀어 앉아 계신 시선이 맘에 들었달까. 꼰대 기질 가득한 끼인 우리 같은 세대에 마냥 아이들을 오냐오냐 키우는 게 답이 아니라는 이야기들이 조금 더 와닿았달까. 왜 그렇잖아. 세대도 다른데 나라도 다르잖아. 우리 부모세대는 후진국이었고, 우리의 성장기엔 개발도상국에 살았고, 우리의 아이들은 선진국에 살고 있으니. 아이가 행복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 고통에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한 능력을 키우게 도와줘야 한다거나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들을 꼬집어 이야기해 주시는데, 뭐 하나 다 챙겨주려는 내 모습이 겹쳐져서 많이 반성하기도 했어. 마스크가 그렇잖아. 이제 코로나는 다 지났는데 아직도 마스크를 끼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종종 보게 돼. 건강을 생각한다면 감기건 폐렴이건 바이러스에 노출되지 않는 게 제일이겠지만 마스크를 벗음으로써 면역력이란 걸 더 키울 수 있는 것처럼. 나도 내 아이에게 잘 못하지만, 세상의 규칙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스스로 부딪히게 해 보려고.
(그 외에도 시간이 된다면 김소영 작가님의 『아이라는 세계』도 추천하는 바임)
그리고 그 시절의 도서목록을 재어보다 또 하나 발견한 게 있어.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인데, 언젠가부터 이게 역주행하고 인기를 얻어서 이미 너도 봤을지 모르겠다. 나는 존 윌리엄스라길래, 작곡가 분이 책도 쓰셨네 하고 보다가 동명이인인걸 알고 머쓱해지긴 했지만. 윌리엄 스토너란 사람이 주인공인데,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대에 들어가 학업을 마치는 대로 농사를 지으려다 우연한 기회에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접하고 영문학 조교수가 돼. 그때까지만 해도 개천에서 용 난 사람 전기인가 보다 싶었어. 그런데 자기가 가르치는 문학과목은 시간이 갈수록 학생들에게 별로 인기도 없고, 정치 싸움에 밀려 죽을 만큼 노력하는데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도 못하고 심지어 아내와는 사이도 나쁜데 하나뿐인 딸은 과부가 되어서 알코올에 의존해서 살아가거든. 심지어 은퇴할 때 되어서 스토너는 암으로 죽고.
스토너는 과연 성공한 인생일까 실패한 인생일까. 그걸 가늠해 보기 이전에, 어찌 보면 세상 평범한 사람이고 살면서 뭐 하나 이룬 게 없단 생각이 들다가도, 그렇게 되기 위해 버티고 부딪히며 살아낸 인생 자체가 위대한 건 아닐지.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인생의 전쟁에서 졌을지라도 하루하루의 전투에서 이기는 삶을 살기 위한 노력 자체가 스토너를 만든 건 아닐지. 그래서 우리 모두는 스토너가 아닌가. 결국 똑같이 흐르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유하는 것이야 말로 평범한 내가 위대해지는 일이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미 새벽 아우는 너무 잘하고 있지 않나 싶어. 부러울 만큼. 언젠가 내가 물은 것 같은데. 그렇게 많은 것에 에너지를 쏟아내면 어떻게 채우느냐고. 심지어 그 에너지가 부러워 나도 뭐라도 따라 하게 된다고. 이미 좋은 영향력을 주변에 내비치는 사람이라고.
미래를 안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아냐 달라지긴 할 거야) 답이 어딨겠어.(그래도 남들의 답이 도움은 되겠지만)
같이 나이 들어가는 처지에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네^^;; 톨스토이와 체홉이 그러했듯이, 이황과 기대승만큼의 사상논의는 아닐지언정, 너와 내가 이렇게 주고받아 쌓여갈 게시물이 좋은 연작이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들어. 고마워.
부딪히고 깨져봐야 계란말이가 될지 얄리가 될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우리 계속, 부딪혀 보자.
그래서 우리 삶은, 계란
2025.03.06.
한진이 형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