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외로움에 문장으로 답하다
김연수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이 언제였는지. 10년도 더 된 듯한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감정만큼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가슴 어딘가를 조용히 두드리는 말, 마치 누군가 내 안의 외로움을 알아봐 준 듯한 문장들. 그때 직감했지. 세상의 모든 외로움을 문장으로 감싸 안으려는 사람이라는 걸.
김연수 작가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속삭임에 가깝다. 세상이 놓쳐버린 목소리, 타인의 시선에 밀려 미처 발화되지 못한 감정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살아있게 한다.
그의 문장에는 어찌 보면 심심하리만치 힘이 없다. 그 말은 곧 힘을 주지 않고도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을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글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내면 깊숙한 자리,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감정의 다락방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문장은 다정하게 문을 열어주며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괜찮아. 나도 그랬어."
『청춘의 문장들』은 그의 작가적 서사를 이해하는 출발점이자, 청춘이라는 이름 아래 방황하고 고뇌했던 시절의 기록이다. 책을 읽으며 버텨낸 외로움, 지나온 어두웠던 터널이 그려진다. 그 시간을 단순히 회상하지 않고 문장을 빌어 복원하는데, 그 문장 속에는 작가의 고백뿐 아니라 읽는 우리 개개인의 청춘이 투영될 수 있는 여백을 갖고 있다.
세계의 불확실성과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한계가 있음을 작품에서 전제하면서도, 그 불편한 한계에 다가가려는 시도가 반복된다. '삶은 한 사람이 살았던 것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며, 그 삶을 얘기하기 위해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이다.'라는 마르케스의 말은 기억과 이야기, 존재와 글쓰기를 오가는 김연수 작가의 태도를 가장 잘 대변한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고쳐 쓰면서도, 늘 처음의 감정, 이야기가 삶이 되는 그 지점을 바라보고 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1991년 한국사회의 격변기에 놓인 화자인 ‘나’는, 학생회 간부이자 방북 예비대표 자격으로 독일에 파견되지만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 잊힌 존재가 된다. 혼란 속에서 그는 수많은 개인의 이야기를 듣고 수집하고 기록하는데, 일본군 학도병으로 남양군도에 끌려갔던 할아버지, 광주의 랭보라 불린 떠돌이 노동자 강시우, 유대인 수용소 생존자이자 제3세계 후원자로 살아가는 피아니스트 베르크,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정민의 삼촌과 같이 모두 역사라는 흐름 속에 사그라간 저마다의 이야기들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공적인 역사가 지워버린 사적인 진실을 복원한다. '진실은 말해질 수 없고, 세계는 투명하게 재현될 수 없다'는 회의 속에서도 그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끝내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서사에서 누락된 이야기를 기록하며, 광활한 우주 속에 혼자일 수밖에 없는 개인들이 서로를 지나쳐 간 시간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교차하는 것이라 말한다.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그렇게 이 소설은 상실과 기억, 말하지 못한 감정들로 엮인 시대에 결친 전 세대의 자전적 초상으로 남는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타인에게는 내가 짐작할 수 없이 아득하고 깊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소설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나'에서 '너', 그리고 '우리'로 시선을 넓혀온 작가는 이 소설에서 개인과 공동체, 진실과 기억, 말해지지 않은 것들과 맞선다.
주인공 카밀라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여성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던 그는 양부가 건넨 사진 한 장을 단서 삼아 과거를 찾기 위해 진남이라는 해안 도시로 향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진실이 아닌 침묵과 은폐다. 사람들은 그녀의 출생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진실에 다가가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 미국과 한국, 입양아와 남겨진 가족이라는 다양한 배경을 넘나들며, 기억과 공동체의 책임을 교차시킨다. 점차 드러나는 진실은 고통스럽고 불편하다. 카밀라는 친오빠의 아이로 태어났으며, 어머니 정지은은 사회의 비극적인 시선과 고립 속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그녀의 아버지인가 보다, 왜 정지은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가이다. 질투와 오해, 침묵이 만든 비극이 이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이 소설은 고통의 재현에 머물지 않는다. 카밀라는 기억하고 말하는 행위, 곧 글쓰기를 통해 존재를 복원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는 문장은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핵심에 닿아 있다. 진실은 단 하나가 아니라, 선택되고 서사화되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인간됨의 증거임을 이 작품을 통해 조용하게 짚는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은 삶의 사소한 순간들 속에 깃든 감정을 포착한 단편집이다. 이 책이 좋았던 점은, 격렬한 감정보다는 미세한 흔들림이나 살면서 그저 그렇게 지나치는 순간의 잔상 같은 정서를 포착하는 데 있다. 작가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시간 속 감정의 잔여물을 붙들어, 그것들을 언어라는 필터로 천천히 걸러낸다. 말없이 남겨진 마음, 설명되지 않은 기억들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것일지도.
『시절일기』는 기록의 힘을 보여주는 산문집이다. 계절과 감정, 사회적 사건과 개인의 내면이 교차하는 일기 형식의 글들은 작가가 어떻게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읽는 사람의 시간을 반추하게 만든다. 이 책은 '사는 것'과 '기록하는 것'이 별개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일상의 균열, 반복되는 피로, 어쩌다 마주치는 기쁨들을 조용히 써 내려가며 작가는 존재의 흔적을 남긴다. 글쓰기는 고백이자 증언이며, 자기 보존의 방식이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이 공존한다. 평범함 속에 스며 있는 가능성과 변화의 씨앗들. 작가는 미래를 '기다림의 시간'으로 그린다.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상상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그는 무언가를 단정하지 않고 항상 여지를 남긴다. 그 여백이 독자에게 조금쯤 맘 편히 발 뻗을 자리를 만들어준다.
김연수 작가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외로움을 조곤조곤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주파수가 맞아 공명한다는 것, 그 존재만으로 위로가 된다. 그리고 작가의 문장은 감정의 공동체를 이루는 다리가 된다. 타인과 나, 과거와 현재, 삶과 문학이 그 문장 속에서 천천히 만난다.
글을 읽고 나면 우리는 시끄럽던 마음이 가라앉고 조용해지며,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것이 김연수라는 작가가 가진 마법이 아닐까.
그는 아무 말 없이 당신 곁에 앉아 한 문장씩 건네는 사람이다. 그리고 당신이 힘겹게 꺼낸 감정에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괜찮아. 나도 그랬어."
이것이 바로 내가 김연수를 사랑하는 이유다.
외로운 이들의 마음을 문장으로 감싸는 사람. 오래도록 잊지 않고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