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사랑한 작가들(2) - 최진영

사랑도 사람의 몫인지라

by 세잇

어느 시인이 그러했죠. 이름을 불러야 비로소 꽃이 된다고 했던가요. 사랑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가끔은, 상대를 바라는 누군가의 목소리로 불러내야 사랑도 사랑이 된다 믿습니다. 최진영 작가의 소설들을 읽다 보면 그런 믿음이 더 깊어지게 되는데요.


그래서 정해봤습니다. 두 번째로 소개하는 작가, '최진영'입니다.


『구의 증명』이란 소설을 통해 작가님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짧지만 충격적이었고, 그만큼 울림이 있어 작가님의 작품세계를 주야장천 읽어 내려갔던 시절을 만들게 해 준 마중물이었죠 :)


그간 『단 한 사람』, 『원도』,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등 여러 소설을 만났던 것 같아요. 이 작품들을 마주하다 보니, (뭐, 저만의 그릇된 생각일지 모르겠으나) 작가가 끈질기게 이야기하려는 하나의 공통된 울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결국 사람의 몫‘이라는 것이에요. 신도, 자연도, 우주도 아닌, 오직 인간만이 감당하고 견뎌야 하는 몫이라는 거죠.




『단 한 사람』은 단 한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수명 중개인’ 목화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단지 선택과 구원의 판타지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이 인간에게 어떤 윤리적 고통이 되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목화는 죽음을 예지 하는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외면할 수 없는 호출이며 세습된 운명이에요. 할머니 '임천자'는 이 능력을 기적으로 믿었고, 엄마 '장미수'는 저주로 여겼거든요. 목화는 그 둘 사이에서 방황하면서도 점점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운명을 이해하고 감당해 갑니다. 작가는 목화를 통해 말합니다.


사랑은 기적이 아니라,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신에게 구걸할 일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목화는 죽음을 막은 뒤 슬퍼하고, 그 죽음을 기억하고, 그 삶을 축복합니다. 살린다는 건 그 이후까지도 감당하는 일임을 깨닫게 되죠. 이 작품에서 신은 무심하고, 나무는 말이 없습니다. 그 모든 침묵 속에 사람만이 애도하고, 기도하며, 사랑을 말합니다. 살아도 귀신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고, 죽어서도 곁에 남는 사람들이 있다는 진실을 목화는 조용히 이해해 갑니다.


사랑이란 결국 감동도 극복도 아닌, 견딤의 다른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고요하고 단단한 고백이 너무도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더라고요.



『구의 증명』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데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후 남겨진 자가 어떤 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연인의 죽음 이후 '담'은 '구'의 몸 일부를 먹습니다. 충격적이었죠. 그렇지만 그 이면에는 절절한 사랑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먹음으로써 그녀는 그를 완전히 자기 안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니까요. 소설 속에서 '담'은 자신을 식인종이라 부르지 않아요. 그저 말없이, 끊임없이 속삭이죠.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너 없이 살 수 없다고.


그 사랑이 얼마나 지독하고 고통스러운지를 그린 이 소설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겪을 수도 있는 상실의 시간을 극단적으로 형상화한 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 또한 애도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고요. 누군가를 끝내 보내지 못하고 품에 안고 살아가는 일. 그것이 사랑이고, 사람의 몫이라고요.



『원도』는 구체적인 사랑보다는, 존재 자체의 결핍과 그 결핍에서 파생된 사랑의 갈망을 그립니다. 주인공은 끝없이 무너지는 삶 속에서 ‘왜 죽지 않았는가’를 자문하는데요. 어릴 적 겪은 트라우마, 가정의 붕괴, 사회적 낙인, 반복되는 실패까지 그의 삶엔 사랑이 없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이 필요한 순간에 사랑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그는 끝없이 바닥을 헤매고, 무너지죠.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살아남습니다. 작가는 어쩌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사랑을 갈구하는 행위라 말하는 걸 수도 있고요.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선, 살아온 시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요. 그 말이 오래 제게 머물더라고요. 기억한다는 건 사랑을 증명하는 방식이기도 하니까요. 사랑했기 때문에, 잊지 않겠다는 선언이지 않을까요.




최진영의 작품 세계에서 사랑은 늘 고통과 함께 찾아옵니다. 죽음, 상실, 기억, 결핍, 폭력... 그 모든 것을 통과한 자만이 사랑을 말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그 사랑은 언제나 조용하고, 조심스럽고, 깊어 보였어요. 눈부시진 않지만 지켜보는 사랑 같아 보였습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 속에서 오래 머무는 사랑. 사랑도 결국 사람의 몫이구나 싶어 작품 하나하나가 마음속에 내려앉아 있습니다.


신은 침묵하고, 나무는 흔들릴 뿐이지만, 사람들은 말할 겁니다. 사랑한다고, 지켜보겠다고, 기억하겠다고. 그래서 우리는 계속 살아갑니다. 비록 사랑의 끝이 구원이 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삶의 유일한 의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건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말이죠. 그 작은 사랑이, 누군가의 삶을 구할지도 모르니까요.


『단 한 사람』의 인상 깊은 구절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keyword
이전 01화내가 사랑한 작가들(1) - 레이먼드 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