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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작가들(5) - 백수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란하길

by 세잇

어떤 글은 읽자마자 마음 한 구석을 툭 하고 건드리는 느낌이 들죠. 크게 울리진 않지만 잔잔하게 스며들어 오래 남는 달까요. 제게 백수린 작가의 글이 그렇습니다. 잔잔한 호수에 내려앉은 나뭇잎처럼, 조용한 감정에 띄우는 울림 같은. 처음엔 별일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다 읽고 나면 소설 속 인물의 마음이 내 마음 같고, 그 장면의 시간이 내 기억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인지 백수린 작가의 글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일상의 미세한 균열과 그 안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힘겹게 지나는, 이 땅의 모든 우리의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여름의 빌라』라는 소설집을 처음 읽었을 때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작가의 책을 처음 마주한 순간이라서 이기도 하겠으나,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주 잔잔하게 흔들리는 느낌이었어요. 이야기 속엔 눈에 띄는 사건이 거의 없는데도, 묘하게 장면 하나하나가 오래 남습니다. 백수린 작가는 인생에 '결정적인 한 장면'이 있다고 믿는 것 같아요.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기억이라도, 시간이 흐르고 문득 떠올라 되돌아볼 때 비로소 제대로 보이는 장면들처럼 말이죠. 예를 들면 「시간의 궤적」에 나오는 장면이 그러합니다.


우산을 써봤자 아무 소용도 없는 비였다. 언니는 이내 우산을 접더니 비를 쫄딱 맞은 채 나에게 빗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우리는 폭우 속을 달렸다.


이 장면은 별일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어느 날 문득 떠오를 만한 기억이 될 겁니다. 그날의 비, 그날의 거리, 함께였던 사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런 걸 다시 떠올리게 되죠. 저는 백수린 작가가 이 ‘시간차’를 다루는 방식이 참 좋았어요. 과거를 그대로 둔 채 시간이 흘러서야 이해하게 되는 감정들. 그걸 작가는 참 조용하고 예리하게 꺼내 보여주더라고요.


『여름의 빌라』에는 상실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런데 상실을 슬픔 그 자체로만 그리지는 않아요. 오히려 상처를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은 울거나 무너지기보다,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상처를 바라봅니다. 그게 얼마나 큰 용기인지 우리가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이죠.


「고요한 사건」에서 화자는 눈송이를 이렇게 말해요.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커다란 눈송이였다. 마른눈. 자국눈. 가랑눈. 그토록 숨 막히는 광경을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그대로 눈송이로 바뀌는 것 같았어요. 설명이 아니라 묘사로, 위로가 아니라 그냥 그 장면으로.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눈이라는 사물에 빗대어 상처를 감추려 하기보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위로가 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눈부신 안부』는 백수린 작가의 첫 장편소설입니다.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면 하고 있죠. 어린 시절 언니를 잃고 죄책감과 체념 속에 살던 해미가 독일로 이주해 간 파독간호사 이모, 독일에서 만난 친구들과 지내며 서서히 회복해 가는 이야기인데요. 흔한 성장소설이 아니라, 깊고 따뜻한 감정들이 구석구석 살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자 이모가 이런 말을 하는데요.


내년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걸 볼 수 있을 테니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아름답지?


저 문장을 듣고 나서 '그래, 살아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이런 문장 하나, 이런 풍경 하나 때문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눈부신 안부』는 이후에 해미가 선자 이모의 어린 시절 첫사랑을 찾으려 했다 20여 년 후에 다시 시도하며,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화해해 나가는 과정을 그려 냅니다. 너무 크게 울지 않고, 너무 빠르게 걷지 않지만, 그래서 더 진심으로 닿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약간의 반전(?)도 숨어 있고요 :)




『폴링 인 폴』의 소설집에 『폴링 인 폴』이나 『거짓말 연습』을 보다 보면 상대에게 건네는 말에 대한 고민이 깊어집니다. 어떤 말은 닿지 않고, 어떤 침묵은 오히려 더 많은 걸 말해주기도 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려는 마음, 서로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건지, 백수린 작가는 그런 지점을 따뜻하게 그려냅니다.


그가 해준 이야기가 내 초라한 사랑에 대한 그만의 응답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이 문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꼭 상대가 이해해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달까요. 그 사람이 나에게 이야기를 건네준 것만으로도 우리는 어쩌면 충분히 위로받을 수 있다는 고백처럼 들렸습니다. 백수린 작가는 그걸 잊지 않게 해 주더라고요.




『다정한 매일매일』과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고 있으면 백수린이라는 사람의 마음을 아주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기분이 듭니다. 단순히 감상을 적은 에세이라기보단, 삶을 대하는 태도가 녹아든 조용한 문장들이지요. 누군가의 슬픔을 무조건 덮어주려 하거나 쉽게 위로하려 하지 않고, 대신 '기다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넵니다.


『다정한 매일매일』에서 작가는 소설 쓰는 일을 빵을 굽는 것에 비유합니다.


누군가에게 건넬 투박하지만 향기로운 빵의 반죽을 빚은 후 그것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는 일.


그 기다림은 누군가를 위하는 시간이고, 말 대신 건네는 다정함이겠죠.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에는 작가와 17년을 함께한 반려견 봉봉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봉봉은 작가가 '미래에 당도할 슬픔에 쉽게 마음을 내맡기기보단, 지금 함께 살아 있음에 최선을 다해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준 존재였다고 해요. 그 문장을 읽으면서 저는 이 작가가 사랑이나 상실, 기쁨이나 고독 같은 복잡한 감정들을 참 다정하게 바라보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두 에세이에서 언급하는 강아지 봉봉, 따끈한 식빵, 부두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할머니, 무심히 앞서 걷던 엄마의 뒷모습까지, 그건 다 지나가버린 일상이지만 백수린 작가는 그런 장면들을 오래 기억하고 조심스럽게 기록한다는 것을요. 오래 남길 바라고, 오래 담아두려 하는 마음 자체가 문학이 아닐까, 그런 말을 건네는 듯했습니다.



세상의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계속 시선을 두는 사람. 그게 백수린이라는 작가이고, 덕분에 우리 자신의 삶을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다시 들여다보게 됩니다.




백수린 작가는 아주 조용하고 섬세한 문장으로, '당신의 마음을 알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내 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나면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다가가고 싶어 지게 만드는 매력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서툴지만 이 다정한 작가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조심스럽게 건네보려고 합니다.

언젠가 작가의 문장들을 만났을 때, 그 문장이 당신의 마음 한구석에 고요하게 머무르길.



그리고 부디, 일상이라는 파도에 힘겹게 노를 젓고 있을 여러분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순간이 찬란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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