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사랑한 작가들(6) - 김영하

그저 지그시 바라볼 뿐

by 세잇

오해라는 첫 만남

지금은 너무도 유명해진, (개인적인 판단으로) 시대의 지성이 되어버린 작가 '김영하'. 내가 김영하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건 오로지 활자 위에서였다. 그의 장편소설인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프랑수아즈 사강이 법정에서 마약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변론에서 한 말을 제목으로 따왔다던데. 제목부터 묘하고 도발적이지 않나 싶다. 책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린 결론은, '이 작가는 뭔가 자극적인 소재를 풀어쓰는 사람이구나' 였던 기억이 난다. 죽음을 택하려는 사람들과 그들을 조력하는 ‘자살 안내인’이라니.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 내려나 싶은 생각으로(약간의 반감과 함께)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읽을수록 단순한 자극만은 아니었다.


이야기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했고 감정적으로 휘몰아치지 않았다. 고통이나 슬픔은 묘사되었지만 과잉되지 않았고, 죽음을 향한 인물들의 걸음은 차가운 수조 속을 걷는 것처럼 느리지만 분명했다. 작가는 그들의 선택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고 구원이나 감동을 약속하지도 않았다. 그 냉정한 거리감이 조금은 불편했지만 동시에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위험하다 느꼈지. 이야기는 너무 자극적이고, 무겁고, 너무 낯설고, 너무 거리감이 있어서. 하지만 그 낯섦은 곧 매혹이 되었다. 작가는 설득하려 하지 않았고 감정을 흔들려하지 않았다. 그저 내가 갖고 있던 죽음에 대한 이해가 서서히 바뀌어 갔을 뿐. 그의 글이 자극적인 게 아니구나, 내가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것뿐이구나. 감정을 억제하고 판단을 유보하며 존재 자체를 들여다보는 태도. 그것이 김영하의 첫인상이었다.



다른 얼굴의 김영하 - 알쓸신잡과 에세이

그로 인해 계속 파보게 되었지. 김영하라는 작가의 소설. 김영하라는 세계에 대해. 『오빠가 돌아왔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같은 단편들을 통해 그는 ‘파괴의 언어’를 넘어 관계의 균열과 감정의 결을 포착하는 데에도 능한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김영하는 조금 차갑고, 날카로운 작가였다. 마치 인간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해부학자처럼.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김영하를 다시 만났다.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 약간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아는 작가가 아니라서. 책 속에서 냉정한 관찰자의 태도를 고수하던 그는, 방송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고 여행지의 음식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다른 출연자들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조용하게 끄덕이며 말하던 그의 모습은 내가 알던 ‘표정 없는 이야기꾼’과는 전혀 달랐다.


작가가 어떤 장소를 바라보고, 어떤 책을 인용하고, 어떤 화두에 관심을 가지는지를 들여다보며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저 쓰는 사람이 아니구나. 사유의 바다를 헤엄치는 사람이구나.


『말하다』와 『보다』 같은 에세이에서도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 '말을 조심스레 고르고 싶다'는 문장이나 '세상을 해석하려 들기보단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말, '잘 쓴 글보다 잘 들은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는 내용들은 작가가 자신이 말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갖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의 언어가 따뜻하게 바뀐 건가 싶었으나, 돌이켜 보니 그는 언제나 따뜻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 따스함을 감지할 만큼 그의 언어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닐는지.


책 속의 침묵과 간결함은 무심함이 아니라 절제였고, 말의 수위를 조절하는 방식이야말로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이지 않았나 싶다. 소설 속에서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방송과 에세이에서는 높은 지성의 사유자로 우리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제야 김영하라는 이름을 하나의 얼굴로만 기억했던 나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다.


책의 언어와 말의 언어가 어긋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보완하는 작가.

그런 작가가 이 시대에 있다는 건 꽤 위안이 되는 일이지.



항상 관찰하고 질문하는 사람

김영하의 글을 계속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이야기의 끝에 질문 하나를 조용히 내려놓는다. 그 질문은 독자를 향한 것이지만, 동시에 작가 자신에게도 되묻는 것이며 무엇보다 인간이라는 존재 전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전형적인 스릴러처럼 시작한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년의 연쇄살인마라는 설정은 극적이지만, 그 이면에 흐르는 것은 ‘기억이 사라진 후에도 나는 나일 수 있는가?’라는 정체성의 질문이다. 그는 이야기 속 인물을 이용해 인간의 본질을 실험대에 올려놓고 냉정하게 관찰한다. 그렇다고 결코 무정하거나 기계적이지 않다. 그 관찰에는 늘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과 유보된 애정이 깔려 있다.


『여행의 이유』에서도 마찬가지다. 표면적으로는 여행 에세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가 던지는 질문은 단순한 체험의 기록이 아니다. '우리는 왜 낯선 곳을 찾아 떠나는가?', '타인의 삶을 살아보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는 여행이라는 행위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해체하며, 새로운 자아를 발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행이 곧 존재의 질문이 되는 지점. 그 지점에서 소설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작가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작별인사』에서는 인간이 아닌 존재, 감정을 배운 인공지능 소년을 등장시킨다. 기계가 감정을 흉내 낼 수 있다면, '감정이란 무엇인가?', '진짜 인간다움은 무엇인가?' 김영하는 과학적 상상력에 도덕적 질문을 섞어 여전히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인간의 정의에 접근한다.


그는 장르를 넘나들면서도 항상 똑같은 질문을 되새긴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작가는 언제나 인물 너머의 구조, 사건 너머의 질문을 본다. 우리는 그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질문 속에 자신을 비추게 된다. 그리고 알게 되겠지.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철학적 질문이었다는 걸.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 하나다.
그래서, 그러므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래서 성찰하게 된다

처음엔 그저 한 권의 책이었다. 한 명의 작가, 낯선 문장, 파격적인 주제. 하지만 김영하 작가의 책을 수년에 걸쳐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지.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단지 하나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오래된 질문과 마주하는 일이라는 걸.


그는 ‘말’이 아닌 ‘관찰’로 시작하고, ‘해석’이 아닌 ‘질문’으로 마무리한다. 그 질문 앞에 독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피할 수 없이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확신들, 익숙한 태도들, 비슷한 감정의 반응들이 문득 의심스러워진다. 강요하지 않지만, 가만히 있으라고도 하지 않는다. 글은 조용하지만, 침묵하지 않는다.


『말하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잘 말하려고 애쓰기보다, 잘 듣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문장에 많이 부끄러웠지. 나는 얼마나 누군가의 말을 온전히 들으려 했을까. 누군가의 삶을 판단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질문을 해보았을까. 그 순간 깨달았다. 김영하의 독자가 된다는 것은, 질문을 다시 배우는 일이라는 것을.


그로 인해 생각을 미루지 않고 판단을 서두르지 않으려 애쓰게 된다.
그리고 그 여백 속에 나조차 미처 몰랐던 내 모습과 감정들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김영하 작가가 내게 남긴 선물이지 않을까.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김영하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익숙한 나를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간 이야기에 쉽게 감정을 실어 이해하고 인물을 선악으로 나눠 판단한다거나, 복잡한 세상에 정답이 있을 것이라 받아들이던 내가, 그의 문장을 통해 낯선 질문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었다.


작가는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관찰하고 기록할 뿐이다.

이는 작가뿐만 아니라 한 인간이 지녀야 할 태도이지 않을까.


김영하라는 작가를 오해했던 시절이 부끄럽진 않다. 그 오해가 있었기에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었고, 이제는 그의 글 너머에 있는 사람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나는 그를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으로서 존경한다. 무엇보다 그가 보여준 관찰하고, 질문하고, 사유하는 태도는 앞으로 잊지 않고 닮고 싶은 삶의 방식이다.


내게 주어진 것을 그저 지그시 바라보고, 사랑해야지.


keyword
이전 05화내가 사랑한 작가들(5) - 백수린